볼쇼이 극장표에 숨겨 있던 불편한 진실
볼쇼이 극장표에 숨겨 있던 불편한 진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06.05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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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우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읽고
황성준 본지 편집위원

1997년 11월로 기억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볼쇼이 극장 입장료 인상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볼쇼이 극장 지배인이 TV에 나와 “만약 볼쇼이 극장 입장료를 인상할 경우 볼쇼이 극장의 발레와 오페라는 일부 부유층의 오락물로 전락될 것이며 대다수의 민중들은 볼쇼이의 높은 문화를 더 이상 향유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볼쇼이 극장 지배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은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정부예산이 부족하며, 따라서 입장료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반복할 뿐인 반대 토론자의 입장은 많은 러시아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나 시청하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공산청년동맹의 진실) 문화부 기자들은 어이없다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볼쇼이 극장을 처음 구경해 본 것은 1990년 12월이었다. 이때 러시아를 처음 방문했는데 거리 모습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기대했던 ‘활기찬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은 전혀 감지할 수 없었고 죽은 유령의 도시마냥 사회 전체가 활력을 상실했다는 느낌만을 줄 뿐이었다. 당시 머릿속에 각인된 ‘사회주의 이념’과 눈앞에 펼쳐진 ‘사회주의 현실’ 간의 괴리는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허위의식’에 애써 끼워 맞추려고 무척 노력했다. 바로 이러한 인식의 딜레마를 다소나마 완화시켜 준 것이 ‘볼쇼이 극장’이었다.

그 웅장함과 화려함, 그리고 청중을 압도하는 공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고급문화를 일반 노동자들도 누린다”는 안내원의 설명은 흔들리던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잠시나마 바로 잡아줄 수 있었다. 당시 볼쇼이 극장 요금은 미화로 0.5달러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귀국해서 전노협(민노총의 전신) 노동자들에게 볼쇼이 극장을 예로 들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취재해 본 볼쇼이 극장의 실체는 충격을 넘어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민중들이 볼쇼이 극장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은 거짓이었다. 1달러 미만인 볼쇼이 극장표는 구할 수가 없었다. 표는 매표소에 애초에 나오질 않았다. 간혹 매표소에 거래되기도 했는데 이는 전체 극장표의 10% 미만이었으며 이 경우도 이른바 ‘검열’을 피하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표는 매표소를 거치지 않고 마피아의 손에 들어갔으며 이들 마피아에 의해 ‘암시장’(Black Market)에서 미화 100달러의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물론 공식(?)가격으로 표를 구하는 방법이 있다. 정부 고위층 인사를 통해 볼쇼이 극장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면 된다. 즉 민중을 위한다며 정부 보조금에 의해 인위적으로 낮춰 놓은 볼쇼이 극장표는 ‘암시장’에서 ‘시장가격’으로, 그리고 정부의 ‘권력’에 의해 배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지배인은 왜 가격인상(정확히는 현실화)에 반대하는 것이었을까? 그 지배인이 바로 마피아 성원이었기 때문이다. 즉 가격이 현실화되면 암시장 이익이 줄어들게 되고 이 경우 자신의 이익이 침해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민중의 이익’을 운운하며 TV 토론에 나와 떠들고 있는 꼴이라니?! 사실이 이러한 ‘사기극’의 본질은 ‘시장경제’에 대한 기초 상식만 알고 있더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재화나 용역은 항상 부족하게 마련이며 따라서 이러한 부족한 재화나 용역을 ‘시장’이 분배할 수 없다면 ‘경제외적 강제’(經濟外的 强制), 즉 조폭이나 국가권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다른 방법도 있다. 제비뽑기나 선착순 그리고 암시장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지식인 사회는 자본주의나 시장경제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고상한 지식인’이 돈과 같이 ‘더러운 것’에 대해 논하는 것 자체가 천박하다하는 사회적 풍조가 강고하다. 혹 시장경제를 옹호하더라도,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할 뿐,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지지할 수는 없다는 것이 많은 ‘먹물’들의 입장이다. 그렇기에 시장과 자본주의를 옹호할 때는 뭔가 뒷골이 당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하는 우익 지식인도 있다.

 

최근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다시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시장경제 한계론’에 대한 답변서이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발발된 경제위기의 본질은 ‘시장의 위기’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정부의 개입’에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현재 신문과 방송의 보도 내용을 보면 2008년 경제 위기는 ‘시장의 탐욕’ 때문이며, 따라서 ‘과도한(?) 시장’을 억제해야 된다는 입장을 상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이는 이른바 보수 언론매체의 논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흐름과 함께, ‘경제 민주화’의 구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민주화란 문자 그대로 민(民)이 주(主)가 되는(化)것이다. 그런데 일부에서 외치는 ‘경제 민주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민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자처 혹은 착각하는 관료 및 일부 지식인들에 의한 ‘계획’ 혹은 ‘권위적(혹은 강제적) 분배’인 것이다. 사실 진정한 ‘경제 민주화’가 필요하다. 진정한 ‘경제 민주화’는 경제 주권을 경제 관료나 일부 지식인들의 손과 머리로부터 일반 경제주체 소비자와 기업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일반 국민의 경제적 판단은 시장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면서 ‘민주화’를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차라리 일반국민들과 기업은 경제에 대해 무지하니, 내가 대신 결정해 주겠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한 태도일 것이며, 이런 경우 이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적어도 ‘민주화’란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우리를 구할 것인가>는 일독을 권할 만한 책이다. 다행히 번역본도 나왔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지나치게 미국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미국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설명은 사전지식의 미비로 지루하게 느껴졌다. 번역을 넘어서서, 우리 사례로 설명한 번안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라는 어느 국립극장 노동조합의 플래카드를 볼 수 있었다. “문화는 자본의 논리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발전을 위해서 봉사하면 되겠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상품 아닌 문화’를 만드는 분들께 천박한 돈 따위가 아닌 고상한 명예를 드리는 것이 그 분들의 품격에 맞는 행위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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