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가 남북한에 남긴 것
6.25가 남북한에 남긴 것
  • 미래한국
  • 승인 2012.06.1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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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작은 차이가 남북한의 큰 차이 만들다

1. 자유의 작은 차이가 남북한의 큰 차이 만들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소련제 T34탱크를 비롯한 2차대전 당시의 최신무기로 남한을 밀고 내려왔을 때 남한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대한민국이 품은 자유민주주의의 어린 싹이 탱크바퀴에 깔려 죽어버리지나 않나 하는 것이었다. 남북한은 5천년 역사를 같이 살아온 같은 민족이지만 1945년 일본 패망과 더불어 38선으로 갈라지면서 북쪽에는 공산독재체제가 들어서고 남쪽에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전혀 새로운 정치체제가 들어와 조그마한 차이를 갖고 서로 다른 길로 출발했다.

아주 작은 차이로 보였다.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국민들의 선거로 뽑았다는 것 외에 군림하는 정부, 부패한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연약한 정부였고, 북한도 공산독재체제였지만 정당이 노동당 하나라는 것 외에 형식상으로 선거도 하고 토지개혁도 해서 남한의 자유민주체제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가고 있었다. 법과 질서라는 입장에서는 북한이 먼저 안정을 찾았으며 경제도 빠르게 발전하는 것으로 보였다.

대한민국은 힘도 없고 아직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그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북한침략군과 싸웠다. 전 자유세계가 대한민국을 지원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태국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이디오피아 등 16개국이 총 34만1천명의 세계 최고 수준의 전투병력을 보내 참전했고 병원선을 보낸 나라가 5개국, 물자를 보낸 나라가 20개국이었다.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싸우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성장해 참혹한 희생은 냈지만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휴전 60년이 지났다. 양쪽이 천국과 지옥으로 갈렸다. 북한 공산체제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독재를 위해 모든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면서 국제적으로는 테러지원국으로 분류돼 국제고립화에 빠졌고 국내적으로는 세계 최악의 몰(沒)인권국가로 전락하면서 300만-400만이 굶어죽거나 독재정권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죽음을 당하는 비참한 상황으로 추락했다. 소위 남조선해방전쟁(6.25남침)에서 큰 공을 세운 북한의 장군들도 김일성독재에 보탬이 되지 않으면 여지없이 총살하거나 추방했다. 인민군 5사단장 김무정, 6사단장 방호산, 휴전회담 대표 이상조 등의 총살, 축출이 대표적인 예이다.

북한독재정권이 들어선 후 배급제로 연명해온 주민들은 3,4대를 지나는 동안 평균키가 154cm로 낮아져 같은 민족이면서도 난쟁이 유전자 체질로 바꿔져 있다.

남한은 북한의 남침으로 거의 무너질 뻔한 자유민주체제를 지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성을 높여왔다. 세계 초일류국가로 가는 여정을 계속했다. 세계 10대경제대국이 됐고 2012년에는 7번째의 2050세계클럽(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천만)에 들어갔다. 지금 세계는 북한을 인권 없는 생지옥국가로 보는 대신 대한민국을 성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표적인 예로 든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대한민국을 선망의 대상, 위대한 자유민주국으로 우러러 본다.

북한도 국경을 열고 인민의 생명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창의활동을 하게 한다면 남한 국민이 이룬 기적의 역사를 이루지 못할 이유가 없지만 독재체제 고수라는 넘을 수 없는 콘크리트장벽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 인민은 서울 불바다론이나 남한의 미제식민지해방론에 파묻혀 있으면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북한정권은 6.25남침 때 ‘서울에서 3일 동안 꾸물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미군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대구전선을 뚫기만 했더라면’, ‘중공군이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더라면’ 등의 한탄을 하면서 지금도 ‘미군만 물러가면’, ‘종북파가 국회만 점령하면’, ‘원자탄의 소형화만 되면’ 등의 허구적 가설을 가지고 ‘남조선 해방’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허구를 떠들어야 3대 독재를 강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북한 인민들은 그런 허구에 어쩔 수 없이 손뼉을 칠 수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남한의 종북좌파가 여기에 넘어가고 있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역사는 흐름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인류는 1,2차에 걸친 세계대전이 인류에게 너무나 참담한 결과를 남겼다면서 다시는 이런 침략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데 합의하게 됐다. 국제연합(UN)을 창설하고 안전보장위원회로 하여금 전쟁방지와 평화유지를 위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도록 장치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정권이 소련의 강력한 군사지원을 갖고 남한을 침략한 것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에 정면 도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은 유엔결의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된 대한민국을 침략한 것은 유엔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과 같은 것이었다. 북한은 1948년 남북총선거를 위해 유엔선거감시단이 북한을 방문하려 했을 때 이를 막아 결국 총선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 우선 선거를 실시했었다.

1950년 6월의 상황은 남북간의 무력대결 자체로 평가하면 남한이 북한공격에 견딜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한반도가 일본의 패망으로 미국-소련의 점령지가 됐을 때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은 민주주의를 심는 정책 아래 정치자유화, 경제자유화, 교육자유화 등의 과정을 통해 많은 시행착오를 저지르고 있었고, 북쪽을 점령한 소련군은 처음부터 김일성이라는 소련군 장교를 우두머리로 내세우면서 공산독재체제를 빠르게 굳혀갔다.

1948년 8월 남북이 각각 다른 정부를 세울 때쯤에는 북한은 소련점령군이 갖고 내려온 수준의 강력한 군사무기를 갖춘 탄탄한 공산독재정부였고, 남한은 수십 개의 정당, 수백 개의 자유기업, 수천 개의 국공립 사립학교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혼란스런 자유민주주의의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이 탱크와 같은 공격용 무기를 갖추고 있으면서 무력 행사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에 여러 번 경고했으나 ‘유엔이 설립하고 유엔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한 대한민국’을 북한이 침략해 올 것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고 탱크 전투기 같은 공격무기도 지원하지 않았다. 공격무기를 제공하면 남한이 북한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T34탱크와 야크전투기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을 휩쓸고 내려왔을 때 북한은 승리를 확신했을 것임이 확실하다. 전면전은 승리의 확신을 갖고 시작한다. 첫째 그들은 대한민국 국군과 상대가 안 될 정도의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내려왔기 때문에 승리를 확신할 만했다.

잘 훈련된 정규군 20만, 탱크 200대, 155mm 장거리포, 방사포, 기계화부대로 서부지역의 개성-문산, 중부지역의 의정부-포천, 동부지역의 춘천-강릉과 해안선을 따라 일제공격을 개시했을 때 한국군은 아직 대대훈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10만 병력으로 탱크나 전투기 또는 155mm 장거리포 같은 공격무기는 말할 것도 없고 소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은 무질서하게 후퇴하고 있었다. 북한의 군사적 계산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해 8월 15일 8.15 광복절 행사를 공산주의 깃발 아래 부산에서 거행한다는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둘째는 남한의 좌익세력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는 계획을 착착 잘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만했다. 김구가 남한단독정부 구성 반대 입장을 보이고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면서 남북회담을 한 여파는 아직도 반(反)이승만정부의 정서를 움직이는 기반이 돼 있고 대구 10월폭동, 제주 4.3폭동, 여순반란사건으로 반정부 무장반란은 이어지고 있어 정국은 매우 어지럽고 어수선했다. 6.25 남침 직전에는 북한이 조만식 선생과 남한과 붙잡아 두고 있는 간첩 이주하 김삼룡을 맞교환하자는 거짓 제안도 해서 남한사회를 속이고 있었다.

군 내부도 북한침략군이 바라는 혼란스런 모양이 전개되고 있었다. 전선을 지키던 두 대대가 월북했고, 남침이 있기 1주일 전 육군본부는 장병의 3분의 1을 농번기 휴가를 보내 부대를 비우고 있었다. 트럭이나 105mm포 같은 주요 군사장비는 육군본부 명령에 의해 여의도 수리창으로 끌려 들어갔다. 6.25 바로 전날 밤에 육군회관 건립 파티에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이 초청받아 밤늦도록 춤추고 즐기면서 만취돼 이튿날 전선에서 총공격 보고가 올라오는 것을 받을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이런 상상할 수 없는 반국가행위들은 성시백(成始伯)이라는 탁월한 북한 첩자가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최근에야 밝혀지고 있지만 전쟁을 바로 눈앞에 둔 시점에서 사회와 군이 이만한 혼란으로 빠져 들 정도로 조종당하고 있었다면 북한으로서는 침략 성공을 장담할 수 있을 만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를 몸에 지닌 시민은 그냥 넘어지지는 않았다.

첫째는 총참모장을 비롯한 많은 고위직 간부들이 간첩의 음모에 걸려들었거나 아니면 평소 자기관리부족으로 전쟁전야에 술을 퍼마시고 장병을 휴가 보내고 무기를 수리창에 집어넣는 국가반역죄를 범했지만 춘천지역을 지키는 6사단장 김종호 대령, 개성-문산지구를 담당한 국군 1사단 백선엽 대령을 비롯한 수많은 국군들은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적의 침범에 대비하고 있었다.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아무도 북한 공산당의 탱크 앞에 무릎을 꿇거나 항복하려 하는 자는 없었다.

6.25 그날 전선을 지키던 국군은 백선엽 사단장을 비롯한 대부분이 3일을 굶었지만 공산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한강을 건너 끈질긴 후퇴작전을 수행했다. 그것은 마치 ‘무릎을 꿇어 편히 살기보다는 죽음으로 자유를 지키려 결사전을 벌인’ 고대 그리스인의 마라톤 전투(BC 490)나 살라미스해전(BC 480)과 같은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리스인들은 2~6배나 되는 대 페르시아 침공군이 쳐들어왔을 때 페르시아군에 항복해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자유 그리스인으로서 싸우다가 죽어 자유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겠다는 결의로 맞서 두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

6.25 때 국군은 서울을 뺏기고 결국 낙동강전선을 최후방어선으로 구축했을 때 “여기서 밀리면 부산 앞바다에 빠져죽는 길 밖에 없다. 죽음으로 싸우자(백선엽 사단장)”고 외쳤고 평양탈환작전을 벌일 때 유엔군보다는 국군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며 맹렬한 싸움을 벌였다. 많은 전투에서 자유대한민국의 군대다운 면모를 보여 줬다. 빨갱이에게 항복할 수 없었으며 북한 인민을 공산정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각오가 강렬했다.

둘째는 자유민주주의는 혼자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온 대한민국 국민이 빨갱이에게 항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싸울 때 자유민주주의 우방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전쟁에서 돈을 벌거나 영토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유를 지키려는 뜻을 높이 사 세계가 대한민국을 도우려 왔던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모든 시민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생명을 바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그런 선한 싸움을 하는 국가를 돕는 일 역시 선한 행위로 인정받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이다.

유엔군은 6. 25를 통해 35만의 귀한 군대를 보냈고 2차대전 전체를 통해 쏟은 화약을 능가하는 엄청난 무기를 보냈다. 유엔군은 4만명의 전사자, 15만9583명의 부상자를 냈다. 어느 나라 하나 한국에 전비를 보상하라든지 영토나 재산을 내놓으라고 말한 국가는 없었다. 이들은 휴전이후 폐허된 한국을 기술과 자원 그리고 인력으로 도울 뿐이었다. 역사가 자유민주주의로 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3. 망한 나라 북한을 따르는 무리들

미국 MIT 교수인 에이스모그루(Acemoglu) 등이 최근 펴낸 ‘국가는 왜 망하는가’(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perty, and Poverty)에는 북한은 이미 망한 나라라고 규정돼 있다. 권력과 경제를 김씨 왕조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인민의 자유와 창의성이 결핍, 도무지 국가발전이 이뤄질 수 없게 돼 있다고 말했다. 압록강을 드나드는 소규모 장사꾼들이 득실거리지만 국경을 넘고 시장에 나가면서 경비병 또는 당 간부들에게 이익의 대부분을 약탈당하기 때문에 자본을 쌓아 기업으로 진출할 수 없다.

사회는 노동당이나 행정부 간부들이 언제 어떤 트집을 잡아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할 지 알 수 없는 무법 무질서가 판치고 있기 때문에 장기계획을 갖고 기업을 하거나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망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300만~400만 인구를 굶어 죽인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미군이 물러가고 대한민국 국회가 종부좌파들의 손에 잡히는 것과 같은 기회가 오면 1950년 6월 25일과 같은 무력통일을 다시 시도할 태세를 굳히고 있다.

6.25 때와 비교해 보면 북한은 남한을 압도할 무기를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원자탄을 보유했다는 핑계로 남한을 압도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또한 종북좌파의 날뛰는 수준이 6 .25 당시의 수준에 결코 못 미치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만 먹으면 통일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게 됐다.(2000년 김정일이 남한 언론사 사장들에게 한 말)
인간의 존엄성이 존재하지 않은 북한을 ‘정통성 있는 국가’ ‘불평등이 없는 국가’ ‘자존심 있는 국가’로 떠받들면서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흠집내는 종북좌파가 남한에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북한이 지난 60년 이상 대남적화투쟁을 계속해온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남한은 휴전을 마치 평화가 온 것으로 착각하는 반면 북한은 휴전이 말 그대로 전면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상태에 들어간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정면전이 아니면 후면전이라도 해야 한다는 논리를 갖고 줄기차게 대남적화공작을 해 왔다. 온갖 통로를 통해 공산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확보해 왔다.

김대중 노무현 두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런 북한의 악질적인 대남파괴활동은 강화됐고 현 정부에 들어서도 그런 잘못된 간첩용인정책을 용인한 데서 결국 종북좌파가 국회에까지 들어가는 어리석은 국가가 된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국가도 자기 국가를 부인하고 자기 국가가 주는 자유를 가지고 그 국가를 파괴하는 세력을 용납하는 국가는 없다. 역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건전한 국민의 도전을 다시 한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정일화 한미안보회 이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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