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의 값비싼 지적 유희
‘마이클 샌델’의 값비싼 지적 유희
  • 미래한국
  • 승인 2012.06.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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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우 칼럼니스트

마이클 샌델의 책은 아주 재미 있다. 스탠다드 재즈가 유유히 흐르는 비 그친 카페의 창가에서 행인들을 바라보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지적 유희를 누가 굳이 마다할 것인가?

심지어 샌델은 최근 출간된 신작의 머리말에서부터 “이 책에서 결정적인 해답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그저 질문을 던지고 딴죽을 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하버드대 교수의 주장에 수십만 한국 대중이 움직였다. 6월 1일에는 연세대에서 1만5천 대중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강연도 마쳤다. 그 뒤에 거액의 개런티가 오고갔다는 사실은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다.

‘개념 있는’2040세대의 대접을 받는 방법

샌델의 폭발적 인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부박한 사고방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개념 있는’ 2040 대접을 받고 싶다면 그 방법은 의외로 간단한 것이다.

1. 모든 문제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나 체제 탓으로 돌린다.
2.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을 큰 소리로 조롱한다.
3. MB정권, 한미FTA, 해군기지 건설 등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SNS에 올린다.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간단한 행동수칙 몇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개념 탑재에는 아주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다. 편안한 자세로 의문을 던지기 위한 삶의 전제조건들 - 이를 테면 평화, 번영, 자유의 조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무너지면 단숨에 모든 것이 ‘배부른 소리’가 돼버린다는 점이다.

카페에 앉아 있는 당신에게 누군가 급박한 상황에 처했다는 전화가 걸려온다면? 그때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첫 장에 나오는 줄서기의 미학이 어떻고 하는 멋진 수사법을 읊조릴 겨를이 있을까? 그에게로 달려가는 동안 밟혀죽은 개미의 생명과 탄소배출량에 대해 반성할 시간이 있을까?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論)이 한국에서 유독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정의가 메말랐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렇듯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도 때로는 필요한 것일는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반대다. 샌델의 인기로 대표되는 정의의 부각은 한국 사회가 충분한 번영을 이룩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보는 게 이성적이다. 등 따시고 배가 부르니 점점 고상한 문제에도 집중할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균형감각의 발로라고 볼 수도 있는 문제니 마냥 비난할 일은 아니다. 우리의 이러한 편안함을 위해 선조들은 그토록 고생을 했던 것이고, 이런 책이나마 안 읽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허나 의욕이 지나쳐 오늘날의 안락함을 가져다 준 근본적인 요인들에 대해서까지 딴죽을 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배은망덕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똑똑한 것도 좋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는 말아야 할 것인데 이 기본적인 룰 자체를 흔들려는 사람들조차도 정의론자의 탈을 태연히 쓰고 있다. 그런 이들의 대표적인 주장 중 하나가 모든 형태의 전쟁을 부정하는 이른바 혐전론(嫌戰論)이다. 6·25 전쟁에 대한 편향적인 해석은 이 주장의 단골 레퍼토리다. 최근에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로 다시 한번 세를 얻기도 했다.

전쟁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해 낸 것 중 최악의 아이디어라는 점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은 도무지 전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상대가 폭력으로 나온다면 이쪽에서도 다른 대응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모든 문제에서 관용(tolerance)의 가치를 견지하지만 상대가 불관용으로 나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불관용에 대한 불관용’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의’가 부각될 수 있는 이유

무턱대고 모든 전쟁을 반대할 수 있는 평화지상주의자들의 자신감에는 현재와 미래의 상황을 위기로 규정하지 않는 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적어도 한국이 앞으로 더 이상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신(神)의 약속이라도 있었다면야 마이클 샌델도 좋고 혐전론도 좋다. 현실이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세계에서 가장 불확실한 권력체제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북한을 머리 위에 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혐전론은 그저 복잡다단한 현실에 대한 도피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모든 게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밖에는 보지 않는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2040이 평화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결국 단 하나밖에 없다.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허나 99일 동안 맑았다는 사실이 나머지 하루도 맑을 것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99일 동안 극진하게 닭을 길러온 주인의 100일째 목적이 삼계탕이었다는 걸 천국에서 알아봐야 닭의 목숨은 이미 달아난 후인 것이다. “우리 주인은 나한테 참 잘해”라는 99일간의 주장은 그 얼마나 황망한 것이란 말인가? 경험이 결여된 확신이란 희망의 동의어일 뿐이다.


한국의 99일이 늘 맑았던 것만도 아니다. 천안함이 있었고 연평도가 있었고 일심회가 있었고 왕재산이 있었다.

우리가 카페에서 마이클 샌델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목숨을 던졌다. 지금도 이름 없는 군인들은 누구도 오지 않길 바라는 바로 그 순간을 시뮬레이션하며 불철주야 대기하고 있다.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뺨을 후려치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전쟁을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샌델에 주목하는 것이 균형 감각이라면 과거의 6·25와 현재의 남북문제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은 지성(知性)의 발로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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