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메달과 국가
올림픽 메달과 국가
  • 미래한국
  • 승인 2012.07.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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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일상에서 국가는 대개 전면이 아니라 이면에 잠복해 있다. 평범한 이들이 항상 국가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국가라는 존재는 더러는 매우 부담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입영통지서가 날아올 때, 세금고지서가 날아올 때, 혹은 딱지를 떼이고 과태료를 내야 할 일들이 발생할 때 등이면 매우 짜증스럽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이렇게 느끼기도 하는 게 굳이 애국심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아무리 자애로운 어머니라도 그 잔소리는 귀찮게 느껴지기 마련이며 더욱이 드물게라도 회초리를 가하기라도 하면 그 순간만큼은 좋을 수가 없다. 말이 좋아 ‘사랑의 매’지 맞는 것 싫어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한 의무를 지우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뜯어가고, 잔소리에 간섭에 때로는 징벌까지 가한다. 이런 걸 즐거워하지 않는 걸 탓할 수는 없다.

그런데 국가라는 존재가 강렬하게 그것도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험은 국민 대부분에 공통적인데, 국가 대항 스포츠가 매개가 될 때다. 월드컵과 올림픽이 단적인 경우다. 국가대표가 나서고 국민들은 국가대표의 활약에 촉각을 세우며 일희(一喜)하고 일비(一悲)한다.

평소에 애국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멋쩍어 하던 이들이 갑자기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미친 듯이 흔들어대거나 “대~한민국”을 열창한다. 그러다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거나 혹은 금메달이라도 따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가 된다. 오는 7월 27일부터 8월 12일까지 런던올림픽이 치러지는 동안 우리는 또 한 번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왜 국가의 이름으로 개인 성취에 열광할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에는 선수들 각각의 개인적인 성취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일에 국가라는 존재의 이름으로 안타까워하거나 기뻐하는 것일까? 국가가 무엇이기에 남의 일에 지나지 않은 것에 마치 자신의 일 인양 감정을 투영하게 만드는 것인가?

마르크스와 레닌에 따르면 국가란 계급 지배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피지배계급 민중들이 그런 따위에 국가의 이름으로 함께 열광하는 건 지배계급이 심어준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놀아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게 된다.

그런데 매우 아이러니 한 것은 스포츠에 거국적인 몰두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 다른 어느 나라보다 열을 올렸던 쪽은 대개 마르크스와 레닌의 계승을 자처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다. 오히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는 좌파들의 상투적 비판과는 반대로 ‘금메달’을 개인의 성취로 조명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서방’ 진영이라고 해서 국가적 분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방’의 국가적 분위기는 위에서의 조장 이전에 아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게 기본 성격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체제의 차이만큼 메달의 의미가 달리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 출신들은 금메달을 딴다 해도 결국에는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메달뿐이거나 잘해야 ‘국가가 수여하는’ 칭찬과 약간의 물질적 대가뿐이었다. 좋게 말해 명예만 누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메달리스트들에게는 설사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 명예에 뒤따라 갖가지 ‘사회적 기회’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다.

사회주의 국가든 자본주의 국가든 일단은 동일한 개인적 성공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그 성공은 아무리 해도 ‘국가에 대한 기여’라는 명예 이상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는 ‘성공’의 스토리는 언제나 대중의 관심사다. 대중은 성공하고 싶어 하고 그래서 성공한 사람을 롤 모델로 삼는다. 그래서 성공 스토리의 후광 효과는 그 자체로 대중에게 소비되고 통용되는 상품가치를 갖는다.

국가가 굳이 배려를 하지 않아도 메달의 명예는 돈이 돼 그 메달리스트에게 보상을 안겨준다. 자본주의 국가의 대중은 애국적 열정을 위에서 애써 조장하지 않아도 언제나 대표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그 성공에 열광할 준비가 돼 있다.

자유가 부여하는 기회에 대한 자부심

물론 자본주의 국가의 대중이라고 해서 메달에 대한 열광이 애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속물적 관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국가의 경우 애국과 통속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하나로 결합돼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그 같은 ‘성취’에 대한 찬사와 열광은 ‘자유로운 국가가 부여하는 기회에 대한 자부심의 표출’에 다름 아니다. 대중들이 의식하든 못하든 그러하다.

우리는 김연아의 금메달에 함께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그 명예에 뒤이어 갖게 된 갖가지 사회적 기회에 대해서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한다. 광고모델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대중이 그녀의 성취를 기꺼이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올바른 체제’의 힘이다.

사람들은 사회주의 자본주의 모두에 국가라는 단어를 습관적으로 붙여 쓰곤 했다. 하지만 국가라고 다 같은 국가가 아니다. ‘국가란 무엇인가?’하는 것은 문명 이래의 줄기찬 관심사였다. 때로는 이상국가의 그림으로 때로는 국가 자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억압기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장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았으며 앞으로도 변치 않을 기준이 하나 있다. 좋은 국가 나쁜 국가라는 차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선악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문명이다. 문명은 인간이 직접적 자연 상태가 부여하는 끊임없는 위험을 넘어 생존과 번영을 위해 보다 더 안전하게 더 많은 기회를 갖고자 한 선택이었다. 완전한 자연 상태를 그리워하며 찬양하는 것은 그 당사자의 취향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더 많은 번영의 기회는 고사하고라도 안전을 만족스럽게 보장한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국가는 바로 그 문명적 문제의식의 답으로 등장했다. 국가는 그래서 바로 그 생존과 번영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한 수호자(守護者 guardian)로서의 성격을 기본으로 한다. 내적으로는 질서를 유지하고 외적으로는 위협을 막아냄으로써 생존을 지탱하고 나아가 번영을 위한 기회를 수호하는 것, 이것이 국가다.

국가는 보모가 아니라 수호자이어야 한다

그래서 국가는 문명적 삶을 전제로 하는 한 당연한 귀결이며 단지 좋은 국가 나쁜 국가가 있으며 그렇게 하여 성공하는 국가, 실패하는 국가가 있을 뿐이다.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가? 바로 그 본래의 임무 그대로 대내외적 위협으로부터 구성원의 생존을 지키고 발전을 위한 기회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국가다. 어떤 국가가 나쁜 국가인가? 수호자로서가 아니라 타락한 억압자가 된 국가가 나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나쁜 국가가 있다. 바로 보모(保姆 babysitter)국가다. 폭군은 분노한 구성원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정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모국가는 그 구성원의 강건한 미덕을 상실시켜 나약과 타락이라는 회복하기 힘든 멸망의 수렁으로 빠뜨린다. 도시국가든 거대판도의 제국이든 또 근대의 국민국가든, 크기가 어떠하고 시대별 제도가 어떠하든, 이런 점에서의 좋고 나쁨의 차이는 마찬가지다.

응석받이를 위한 배려가 아니라 당당한 어른을 위한 자유로운 기회의 수호! 우리가 메달리스트의 성취에 보내는 박수갈채에는 그 기회를 부여하고 지키는 체제에 대한 찬사가 함께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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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ely man-made Oakley sunglas 2014-07-16 00: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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