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터뷰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미래인터뷰 -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 미래한국
  • 승인 2012.07.0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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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외교 전문인력 양성 시급하다”

“애국가가 국가(國歌)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어서 걱정입니다. 당장 런던올림픽에 가면 국기와 국가가 있어야 하고, 국가 정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이 던진 첫 마디다. “나라를 이끄는 것은 정치이기 때문에 대선에 관심이 간다. 경륜과 비전 있고 신뢰가 높은 사람을 뽑아야 한다”면서 토로한 말이다. 수십 년 간 여러 올림픽을 거치며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국가를 대표했던 스포츠외교 베테랑이자 원로로서 간직한 걱정이었다.

“강연도 많이 다니는데 정치 얘기는 별로 안해요. 할 수는 있지만 학생들이 ‘안철수 같은 사람은 되면 안 된다’는 식의 말은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어느 시대에나 데마고그(선동 정치인)는 있었지만 이기지는 못했죠. 그가 과연 20대 실직, 30대 자녀교육, 40대 내집 마련, 50대 노후 문제에 대해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김 전 부위원장의 사무실은 올림픽 관련 서류와 도록으로 가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비롯해 각종 세계대회의 국내유치에 힘쓰고, 태권도를 세계화하는 데 공헌한 행로가 그의 책장에 줄줄이 한가득이었다. 얼마 전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인명정보기관(ABI, American Biographical Institute)이 발간하는 인명사전에 올라 세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등재하기도 했다. 세계 체육계를 주 무대로 뛰어서인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유명 인사가 된 것이다.

세계태권도연맹 창설, 스포츠외교의 길을 걷다

1931년 출생인 그는 6·25 전쟁 당시 연락장교로 참전한 뒤 100: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보병학교에 합격했다. 뛰어난 영어 실력의 도움이 컸다. 이승만 정권 때는 계엄사령관 부관으로 대통령의 연설을 통역하기도 했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외교관을 꿈꾸던 청년의 길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호실 보좌관으로 일하며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에게서 국회의원 권유를 받았지만 4·19혁명을 겪으며 정치에 신물이 난 덕에 거절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대한태권도협회장이었다. 당시만 해도 태권도는 ‘춘추전국시대’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조직도 없이 각 도장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다들 떠맡기 꺼려하는 회장을 맡은 후, 그는 협회의 구심점이 되는 국기원을 설립하고 태권도의 역사와 경기 규칙을 정립하는 등 태권도 체계화에 힘쓰기 시작했다.

“국기원을 건립한 후에 태권도를 세계에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제1회 세계태권도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국고 보조도 없이 세계에 나가 있는 사범들이 전부 자비를 들여 제자들을 데리고 참가했죠. 미국, 독일, 한국, 프랑스, 대만, 우간다, 코트디부아르, 일본(재일교포), 멕시코 등 모두 20개 팀이 참가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다음날 출전한 대표들을 모아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죠.”

스포츠계에 들어선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스포츠외교 무대 일선에 나서게 된 것도 이때였다. 국기원 원장과 대한태권도연맹 회장이라는 직함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 겸 명예총무가 되면서 전문 스포츠 외교관으로서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이 처음 기획된 것도 이 즈음인 박정희 정권 때였다. 김 전 부위원장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열게 될 것이라고는 꿈도 못 꾸던 시대였다. 그저 아시안게임이나 한 번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1978년 한국에서 제49회 세계사격대회가 열리면서 박 대통령이 자신감이 생겼는지 ‘올림픽을 유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다들 부정적이었지만 박 대통령은 어려울 때 ‘끝발’ 올리려면 올림픽을 해야 한다며 밀고 나갔죠. 결국 박 대통령 서거 후 흐지부지 되다 전두환 정권이 시작되면서 다시 올림픽 바람이 불기 시작했어요. 경쟁 상대가 일본 나고야라 당시로서는 한참 불리한 게임이었죠. 그런데 일본은 나고야에서만 움직였지만 우리는 국가적으로 준비했습니다. 각계 인사들과 기업이 후원하고 준비도 철저히 했어요. 막상 준비한 것을 보니 나고야는 너무 방심했는지 준비가 허술하고 저희는 열과 성의를 다한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52대 27의 큰 차로 승리했습니다.”

 

서울올림픽 유치와 준비의 뒷이야기…

김 부위원장은 예상치 못한 승리 후 벅찬 감격과 함께 산재한 일들이 압박감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평화시 인류 최대 제전’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준비해야 했지만 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력으로는 다소 벅찬 일이기도 했다. 세관, 출입국 수속, 통신, 방송, 언어, 경기장 시설, 안전, 공항통제, 해상운수업을 비롯해 소소하게는 경기용 말들의 방역문제까지 끝없는 난제가 펼쳐졌다.

가장 큰 난관은 정치와 외교 문제였다. 동구권 국가들의 보이콧과 테러 위협, 장소 변경 요구 등 갖가지 방해가 잇따랐다. 특히 보이콧 문제는 올림픽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 국가와는 교류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교섭조차 쉽지 않았다. 공식적인 외교와 경제 관계는 물론 문화적으로도 연계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세계 스포츠계의 주요 인사였던 그의 역할이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교섭을 시작하자 우리나라와 4, 50년간 차단돼 있던 나라라는 사실이 절감되더군요. 언어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너무 달랐으니까요. 마치 어둠 속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암흑 속에서의 교신’이라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특히 소련이 문제였습니다. 84년 LA 올림픽 당시 소련의 보이콧 때문에 IOC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거든요. 소련은 자신들의 선박을 인천항에 정박 시키지 않으면 참가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임원진과 선수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는데 스포츠대회에서 1,2등을 다투는 나라인 만큼 선수 관리에 상당한 신경을 썼거든요. 하지만 정부에서 승인이 날지, 국민들은 간첩선이라고 생각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다행히 사정을 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흔쾌히 허락을 내렸고 숙박은 올림픽선수촌에서 한다는 조건으로 정박을 허가했다.

이 외에도 국제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이 많았다. 이란과 이라크, 대만과 중국, 인도와 파키스탄, 터키와 불가리아, 영국과 아르헨티나 등 수많은 나라들의 미묘한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서로 관계가 껄끄러운 국가들끼리는 행진과 각종 의식을 따로 시켰고 숙박도 다른 건물에 배치했다. 그럼에도 대만이 국기를 사용할 때마다 중국인들이 심한 항의를 해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치른 서울올림픽의 개최는 “어느 도시, 어느 민족, 어느 국가도 이처럼 열정적이고 지혜롭게, 또 조직적 기술로써 올림픽을 치러낸 적은 없었다”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격찬을 받으며 성공리에 마무리 됐다. 이어 모스크바의 오케스트라단과 발레단이 방문하고 일본의 가부키가 알려지는 등 이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문화적인 교류가 활발해졌고 민주화를 앞당겼다는 평가도 받았다.

“올림픽으로 인한 효과는 돈으로 따질 수가 없습니다. 정치, 사회, 과학, 학술, 의료 등 다양한 분야가 도약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우리도 하면 된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식개혁을 한 것입니다. 세계무대를 향해 달리게 된 것이죠. 결국 서울올림픽이 나라를 지킨 셈입니다.”
서울올림픽이 특히 소련과 동구권 민주화의 바람에 크게 영향을 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지난번에 충청도 한민대학에서 열린 평화포럼에서 고르바초프한테 ‘올림픽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했더니 ‘아닙니다. 동구권 민주화가 서올올림픽 덕분에 빨라졌다’고 오히려 고맙다는 표현을 했다”고 전했다.

“소련의 NOC(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서울의 백화점과 시장을 방문하더니 국내 백화점을 소련에 들여가는 등 자본주의 문화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서울에 오니 컬러 TV가 있고 한강도 무척 단장됐으니까요. 올림픽을 치르거나 참가하면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제적인 룰이 있고 요구조건이 있고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니까요. 중국도 베이징올림픽 덕분에 세계화가 됐죠. 정말 돈으로는 계산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역대 최고의 올림픽, 최상의 찬사가 이어지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의 대표는 차례로 조직위원장을 맡았던 노태우 위원장과 박세직 위원장이었지만, IOC 등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실무적으로 활동했던 사람은 김운용 전 부위원장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위원장들의 배려로 마음껏 일할 수 있었다”며 “그 당시를 떠올려 봐도 국제 스포츠외교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경험 있는 전문 인력들을 양성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서울올림픽 때 고마운 점은 전두환 대통령이나 노태우, 박세직 위원장이 많은 부분을 저에게 일임하고 권한을 줬다는 것입니다. 동구권 외교, TV 방영권 교섭, 문화 사절 방문 등 제가 책임감을 갖고 일 했습니다. 물론 IOC와 같이 의논하며 결정한 것들이죠. 당시 훈련된 상태에서 뛰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전문인과 정치적으로 임명된 사람은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문 인력이 좀 더 충실하게 일하죠. 자기의 일을 알기 때문에 하려고 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해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써야죠.”

김 전 부위원장은 대한민국의 스포츠 외교관으로서 겪은 비화도 들려줬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시드니올림픽대회 남북공동 입장 당시의 일이다.

“50년 만에 남북 동시 입장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교섭이 참 어려웠거든요. 평양 가서 김정일 위원장한테 얘기하니까 대답도 안하고 ‘남북이 합해서 세계 제패할 수 있는 스포츠가 뭐가 있냐?’는 식의 질문이나 하고 말이죠. 결국 어렵사리 성사가 됐지만 국호 문제, 경기 참여 문제 등 미묘한 사안들이 많았는데 국호는 코리아로 했고 기는 한반도기로 하게 됐습니다. 문제가 한 가지 더 있었어요. 우리가 300명인데 북한은 60명이었습니다. 결국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각각 90명씩 하기로 했죠. 그나마 북한은 20명이 모자라 경기 전에 급조해서 데려왔어요.”

스포츠 정책이나 외교의 인력 문제와 관련해 그는 정부의 인사 문제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그는 “차관, 장관, 국장을 체육과 무관한 사람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하고, 월드컵 사무총장 하다 동계올림픽 사무총장 하는 이런 인사 가지고는 사람들이 따라가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정부 부처에서 체육부가 사라지는 등 위축된 체육계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오늘의 체육은 옛날처럼 힘이 세고 공부 못하는 사람이 하는 분야가 아닙니다. 이제는 경제 발전과 함께 전 국민이 운동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각종 세계대회를 치르면서 스포츠 강국이 되지 않았습니까? 요새는 고령화 시대가 돼서 옛날엔 수명이 60세였는데 이젠 80세까지 삽니다. 노년들의 여가활동, 취미도 다양해져서 생활 체육 매니지먼트를 해야 할 판에 세계 무대에서 메달 따줄 때만 좋다고 하면 안 되죠. 또 현재 교육 문제에서 게임 중독과 폭력 등 인성교육이 필요한 시점인 만큼 체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체육부가 하나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스포츠와 정치는 보완관계”

김 전 부 위원장은 스포츠와 정치의 상관관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예전에는 스포츠와 정치가 서로 독립적인 관계라고 했지만 이젠 서로 독립이 안 돼요. 스포츠의 메시지가 크니까 기업도 후원하는 거지 IOC가 예뻐서 돈 내겠습니까?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제일 좋은데 이제는 정치가 많이 관여한다”며 웃었다.

최근의 근황을 묻자 그는 “잘 먹고 운동하며 편안히 지내고 있다”며 담담한 심경을 밝혔다. 정치 활동에 뜻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이제는 그럴 시점이 아니다”며 “조언하는 것도 없이 걱정만 하고 있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7월에 열리는 런던올림픽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

“48년 런던올림픽 당시에는 처음으로 태극기 달고 모금해서 60명이 배타고 갔었는데요. 태극기가 올라가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약소국으로 간 것이지만 이제는 강대한 스포츠 강국의 선수단으로서 가는 것이니까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올해는 런던이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0주년이라 올림픽이 대대적으로 열릴 것이고 우리도 국위선양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새 안 그래도 국내에 온갖 사기 사건과 세금 낭비 등 기막힌 일들이 많았는데 국민들이 태극기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위로를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정리·사진/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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