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소련팀을 응원했던 '쓸모 있는 바보'
88년 소련팀을 응원했던 '쓸모 있는 바보'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07.09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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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 채런(Mona Chren)의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을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88년 9월 28일 잠실체육관.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이 압승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2.23m의 장신 사보니스를 앞세운 소련팀이 경기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이 경기를 지켜본 한국 관중들은 열광적으로 소련팀을 응원했다. “소련 이겨라” “USSR 파이팅” 구호가 외쳐졌다.

일부 관중들은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련국기를 흔들기도 했다. 심지어 “잘한다! 씨씨피”라는 엉터리 응원구호도 외쳐졌다.(러시아 키릴문자로 소련을 СССР라고 표시하는데, 이를 영어 알파벳으로 옮기면 SSSR에 해당된다. 즉 키릴문자 СССР는 ‘세세세르’라고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관중들이 소련 선수 운동복에 적혀진 러시아 키릴 문자를 영어로 착각해서 ‘씨씨피’라고 읽은 것이다!)

당시 필자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관중석을 한 바퀴 돌았다. 이번 ‘소련 응원 투쟁’이 대성공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경기장을 빠져 나와, 이번 투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지도부가 기다리고 있는 한 호프집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경기 결과는 82:76. 소련팀의 승리였다. 세계 언론은 소련팀의 승리, 아니 한국인들의 열광적 소련팀 응원을 대서특필했다.

88년 주사파들의 ‘분단 올림픽’ 저지 투쟁

88년 주사파들은 이른바 ‘분단올림픽 저지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88올림픽은 영구분단을 획책하려는 미국과 그의 하수인 군사독재정권의 음모이기에 결사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88올림픽을 저지하기 위한 각종 시위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주사파가 장악하고 있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88올림픽 저지투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러한 88올림픽 저지투쟁노선은 이른바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 불리는 북한의 대남조직에 의해 주도됐으며, ‘한민전’의 대남방송인 ‘구국의 목소리’ 방송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분단 올림픽은 반드시 저지돼야 한다”고 연일 선동하고 있었다. 그 결과 대학가는 88올림픽 반대 구호와 플래카드로 뒤덮여 있었으며, “88올림픽 저지”를 외치는 대학생들과 전경의 거리 전투로, 주로 거리가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뒤덮이곤 했다.

반면 PD파 운동권 세력들은 88올림픽 저지투쟁보다는 ‘민중생존권 수호투쟁’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주사파의 ‘88올림픽 저지투쟁’에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88올림픽이 다가오면서 88올림픽을 무시하고 이른바 ‘민중생존권 수호투쟁’만을 전개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88올림픽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것을 강요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필자가 소속돼 있던 이른바 ‘여명그룹’이라 불린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조직은 일본을 통해 입수한 소련의 ‘Progress 출판사’ 문헌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었다.

‘Progress 출판사’는 소련의 대외선전기관으로서, 공산주의 이론 혹은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의 각종 출판물을 영어, 일어를 비롯한 각종 외국어로 출판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이른바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투쟁노선’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이 입장에서 “88올림픽은 평화와 진보를 위한 투쟁의 교두보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북한의 88올림픽 저지투쟁 입장을 반대하고, “88올림픽을 사회주의권 위상을 높이는 친사회주의 선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감히(!) 사회주의를 공개적으로 선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분명히 마르크스-레닌주의자 혹은 김일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좌경 용공 조작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명그룹은 이러한 ‘타부’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타부파괴 선도투쟁’(혹은 사회주의자 커밍아웃투쟁)을 88올림픽을 계기로 전개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특히 이미 소련과 중국은 물론, 북한과 쿠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참여를 결정한 마당에 ‘88올림픽 저지투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 옹호투쟁’ 혹은 ‘반공이데올로기 무력화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소련팀 응원단을 구성하다

바로 이러한 투쟁의 한 방법 혹은 ‘투쟁고리’로서, 소련팀 응원단 구성을 추진하게 됐다. 특히 당시 88올림픽에 참가한 일부 미국 선수들의 건방진 행동은 많은 한국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반미 정서와 결합되면서 더욱 증폭되기 시작했다.

특히 약팀에 대해 응원하는 분위기가 강한 한국민의 정서는, 처음 대면하는 사회주의권 운동선수들에 대한 호기심과 맞물리면서, ‘반미친소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정세에 맞춰, 9월 28일 미소 농구경기를 디데이로 선정, 이른바 ‘소련 응원투쟁’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겼다.

당장 동원하기 쉬운 학생운동조직을 움직였다. 학생운동조직을 통해 200명 정도의 행동대 조직이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훈련된 3학년 학생이 각각 1~2학년 학생 4~8명을 데리고 잠실체육관에 집결했다. 팀장격에 해당되는 3학년 학생들은 이른바 ‘현장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왠지 모를 미국에 대한 반감과 사회주의권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약팀에 대한 동정심으로 어우러진 분위기가 체육관을 휘감고 있었는데, 약 200명의 조직된 응원단이 나타난 것이었다. 경기장은 완전히 소련 홈그라운드를 방불케 했다. 미국 선수들은 적지에 들어온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응원 탓인지, 예상을 뒤엎고 선전한 소련팀이 승리했다. 그날 외신의 주요 뉴스였다. 친미반공의 기지로만 알려진 대한민국에서 미국팀이 일방적으로 야유당하고, 소련팀이 응원되는 믿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1990년 12월 처음 모스크바에 들어갔을 때, 필자는 88올림픽에서의 ‘소련응원단 투쟁’을 자랑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환대받았다. 그리고 영웅이 된 양 우쭐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 8월 소련 불발 친위쿠데타 이후 소련이 사실상 해체돼 갈 때 88올림픽이야말로 “사망해 가던 소련 사회주의에 대해 마지막 일격을 가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당시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국 비서들과 토론할 기회를 가졌는데 이들은 “88올림픽의 충격은 뇌사 상태로 누워 있던 소련 사회주의에게서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소련 붕괴 시킨 88올림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진영이 거부했으며, 이에 대한 항의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동구진영이 거부했다. 그 결과 12년 만에 서구와 동구 진영이 모두 참여하게 된 88서울 올림픽에 대한 기대는 남다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소련 공산당 국제국 간부들의 말을 빌리자면 당시 소련은 대한민국 수준을 우습게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선전장소로 삼으려 했으며 서방국가에서 열린 과거 올림픽과 달리 소련 언론에 대한 통제도 크게 강화하지 않았다. 1985년 시작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티(개방)에 대한 고르바초프 정부의 의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런데 TV화면을 통해 비춰진 서울의 모습은 일반 소련국민은 물론 소련 지도부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과거 서구에서의 올림픽과는 전혀 다른 영향이었다. 서구 국가에서의 올림픽에 대해서는 소련 당국도 나름대로 많이 대비했다. TV화면과 앵글로 교묘히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소련 국민들에게 설명할 말이 있었다. 

“서구가 잘 사는 것은 제국주의적 착취 덕분이며, 그나마도 일부 계층에 한정된 것”이라는 선전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닌 것처럼 들렸다. 아니 일반 소련 국민들에게 미국이나 영국이 소련보다 잘 사는 것은 원래 그러했기 때문에 별로 놀라운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모습은 달랐다. ‘미제국주의 착취 대상’인 한국이 저토록 발전된 모습을 보이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페레스트로이카 등의 여파로 거의 여과 없이 서울의 모습이 소련 각 가정의 TV를 통해 비춰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서울의 성공된 모습은 사회주의의 실패와 극렬한 대조를 이루며 소련 국민들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단지 소련 일반 국민들만이 아니었다. 소련 지도부도 ‘정신적 공황’을 맛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소련만이 아니었다. 1992년 처음 여행해 본 동구권 국가들에서도 88올림픽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한결같았다. “88올림픽을 보고 충격 받았으며, 그 결과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구권 붕괴였다”는 것이었다.

국회로 진출한 쓸모 있는 바보들

올림픽 시절만 되면 88올림픽 당시에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 바보’였었는지를 떠올린다. ‘분단 올림픽’을 반대한 자들이나, ‘평화와 진보(여기서 진보는 사회주의) 올림픽’을 주장하면서 소련팀을 응원한 자들이나, 모두 ‘바보’였다. 그런데 당시 ‘분단 올림픽 저지’를 외친 전대협 간부들이 이번 국회에 대거 입성했다. 과연 이들은 지금 88올림픽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자신들이 주도한 ‘분단 올림픽 저지투쟁’을 민주화 투쟁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할까? 하기야 ‘분단 올림픽 저지투쟁’으로 구속됐던 사람들은 모두 ‘민주화 투사’로 분류돼 정부로부터 보상금까지 받은 상황이니…

88올림픽으로 소련과 동구권은 붕괴됐다. 북한은 88올림픽으로 약화된 위상을 만회하고자 이듬해인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했다. ‘통일의 꽃’(?) 임수경 의원이 전대협 대표로 이 대회에 파견됐다. 그리고 바로 이벤트 덕분에 국회의원 배지를 달 수 있었다.

이미 결과가 다 드러났지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의 얼마 되지 않는 외화를 소진시키는 사건이었을 뿐 대외적 위상을 변화시키는 데 거의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이를 보고 감동을 느꼈다는 일부 남한의 주사파를 제외한다면…)

오래 전에 사 두었다가 앞부분만 읽고 서재에 꽂아 놓았던 모나 채런의 <쓸모 있는 바보들>을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쓸모 있는 바보’란 소련의 사회주의 선전에 놀아나는 서구 좌익 혹은 리버럴 지식인들을 일컬은 레닌의 표현이다.

자신들은 ‘혁명가’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소련이나 북한 입장에서는 결국 ‘바보’였다. 하기야 이러한 필자의 ‘바보짓’이 의도와는 정반대로 소련 해체에 기여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정말 역사의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아직 해체되지 않은 북한의 ‘쓸모 있는 바보’들이 학원가를 넘어 국회까지 버젓이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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