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올림픽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7.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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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런던 올림픽이 시작된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는 구호 아래, 203개국 선수들이 26개 종목(세부종목 302개)에서 개인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겨루게 된다. 또 전 세계인이 경기장에서, 그리고 TV(요즘은 PC, 스마트폰, 태블릿) 앞에서, 선수들의 선전를 기원하며 열광하고 환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올림픽 행사의 의의를 애써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다.올림픽은 ‘3S정책’(Sex, Screen, Sports)의 하나이며, 또 요즘 올림픽은 정치와 상업주의로 얼룩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빵과 서커스’가 항상 필요하다. ‘빵과 서커스’에만 현혹돼 ‘높은 가치와 이상’을 저버리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행위지만, 이것이 ‘빵과 서커스’를 제거해야 된다는 논리로 발전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근대 올림픽이 ‘정치’에 오염되고 타락됐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1936년 베를린올림픽은 독일 나치 정권의 입지를 강화시켜줬다. 그리고 1964년 도쿄올림픽, 1988년 서울올림픽,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각 주최국의 경제성장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국력신장을 과시하는 대회였다.

그러나 조금 솔직해지자.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올림픽이 가능할까? 아니다.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에 의해 주창돼 1896년 아테네에서 처음 치러진 근대 올림픽은 전쟁을 방지하고 국제사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시작됐다.

아니 고대 그리스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 간의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따라서 올림픽은 정치와 완전 분리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에게서 ‘이기심’을 완전 제거하려는 노력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올림픽을 통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은 ‘스포츠맨 정신’이다. 근대 스포츠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영국 명문 사립학교에서 청년들의 체력을 증진시키고, 올바른 정신을 함양시켜 주기 위해 발전시킨 것이 근대 스포츠와 그 정신이다. 스포츠는 일정한 룰에 따라 경기를 진행한다. 이 경기에서 배우는 것은 ‘경쟁’과 ‘룰의 지배’이다.

이 두 가지 정신이야말로 근대사회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근대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태동되고 발전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승복하는 정신이다. 바로 이러한 ‘스포츠맨 정신’이야말로 현대 사회에 만연하기 쉬운 ‘니힐리즘’과 ‘딴지걸기’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올림픽은 ‘애국주의’를 강화시켜 준다. 일부 인텔리들은 ‘애국주의’를 ‘국수주의’와 동일시하며 애써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맹목적 민족주의’와 다르다. 국가는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다. 국가는 ‘가치 공동체’이다. 즉 대한민국은 한민족 공동체이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측면에서 ‘조선왕조’(이씨 왕조와 김씨 왕조)와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이다.

이러한 ‘가치 운명 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그 공동체 유지와 발전에 필수적 조건이다. 이러한 ‘애국’의 가치를 운동경기만큼 더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것도 없을 것이다.(전쟁을 제외한다면)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통해 국제무대에 당당한 일원으로 등장했으며 2002월드컵을 통해 애국의 가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태극기’와 ‘애국가’의 가치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우리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한다. 그리고 올라가는 태극기와 울려 퍼지는 애국가 속에서 또 다시 감격의 기쁨을 만끽해 보자.

황성준 편집위원 - 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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