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승리한 해전(海戰)도 기념하자!
이젠 승리한 해전(海戰)도 기념하자!
  • 미래한국
  • 승인 2012.07.1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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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의 서해교전 중 2승 1판정승

연평도 해전 10주기를 맞아 대다수 언론들은 2002년 숨지게 한 제2연평해전 추념식만 보도하느라 바빴다. 왜 우리는 ‘승전 기념’은 제대로 하지 않을까?

젊은 장병들의 패기 보여준 첫 승전

서해상에서 NLL을 경계로 북한과 겨룬 건 3번. 2승 1판정승으로 모두 승리했다. 그 시작은 제1연평해전이었다.

1999년 6월 15일 80톤급 북한 경비정 2척이 인민무력부 소속 꽃게잡이 어선 20여 척을 끌고 NLL 남쪽 2km 해역까지 침범했다. 이어 북한군 어뢰정 3척도 NLL 남쪽으로 슬금슬금 내려왔다.

6월 6일부터 북한의 행동을 지켜보던 우리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등 10여 척을 인근에 배치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NLL까지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보고 우리 해군은 참을 수 없었다. 곧바로 참수리 고속정을 출동시켜 오전 9시 7분과 9시 20분, 선체로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았다.

이에 북한 경비정은 우리 고속정을 향해 소총으로 선제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25mm 기관포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북한 어뢰정 3척도 공격에 가담했다.

우리 해군은 즉각 주변에 있던 초계함의 76mm 함포와 고속정에 장착한 40mm 기관포로 응사했다. 결과는 우리 해군의 대승이었다.
짧은 교전이었음에도 북한 어뢰정 1척이 침몰하고, 420톤급 경비정 1척이 대파됐다. 나머지 4척의 북한 경비정도 크게 파손됐다. 북한군은 20여 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반면 우리 해군 함정이 피격되기는 했지만 전사자는 없었다. 부상자는 11명이었다. 그 중 7명은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 나중에 퇴원했다.

함부로 행동하다 패한 북한군은 교전 직후인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과의 장성급 회담에서 “한국 해군이 먼저 도발했다”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억지를 부렸다.

당시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처음에는 “전쟁 나는 것 아니냐”며 걱정하다 우리 해군이 큰 피해 없이 북한군 경비정과 어뢰정을 격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성을 질렀다. 북한군과의 교전임에도 겁먹지 않고 대응한 해군 장병들에 대한 칭찬과 격려도 쏟아졌다.반면 종북세력들은 ‘X씹은 표정’이 됐다. 한호석 같은 해외거주 종북주의자는 “연평해전에서 한국 해군은 패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김정일은 패전 보고를 듣고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2000년 4월 연평해전을 일으킨 부대를 찾아 복수할 것을 지시했다. 함장도 새로 임명하고 무기도 바꿨다. 2002년 초에는 연평해전에서 강등된 장교들을 복직시키고 복수를 명령했다.

2002년 6월 29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4강전을 보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을 때였다. 북한 경비정들은 1999년처럼 슬금슬금 NLL을 침범한 뒤 접근하는 우리 해군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공격을 퍼부었다.

DJ의 배신인가 종북세력의 승리인가

이 도발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숨지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8전대 출신 탈북자는 당시 북한군의 피해가 사망 3명, 부상 5~6명이었다고 밝혔다. 김정일 패거리는 이 ‘승리’를 자축했다고 한다. 도발을 이끈 8전대의 사기가 충천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제는 왜 이렇게 됐는지 우리 국민 모두 안다.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정성 당시 해군2함대 사령관은 ‘승전’을 이유로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는 진급도 못하고 군문을 나섰다.

제1연평해전 당시 교전수칙은 먼저 경고방송을 한 뒤 이를 듣지 않으면 바로 ‘차단기동’으로 밀어내기 버리는 것이었다. 이는 1997년 YS정부 때 만든 것이었다.

이 교전수칙은 더 황당하게 바뀌었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후 ‘시위기동’을 통해 위협을 한 뒤 그래도 안 되면 ‘차단기동’을 하도록 한 단계를 더 넣었다. 결국 새로운 교전수칙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북한군의 선제공격을 당한 것이었다.
이 일에 대한 반성으로 2004년 교전수칙은 경고방송 후 경고사격, 타격으로 간단하게 바뀌었고 그 결과 2009년 제3연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퍼주기식 대북정책은 사라졌다. 10년 넘게 ‘조공’을 받아 챙기던 김정일 패거리에게는 충격이었다. 안되겠다 싶었는지 도발을 준비했다.

김정일 ‘빅엿’ 먹인 대청해전

2009년 11월 10일 오전 11시 27분 북한군 경비정 등산곶 383호가 NLL을 침범했다. 우리 해군 고속정은 두 차례에 걸쳐 경고통신을 보냈다. 결국 우리 고속정 참수리 325호가 11시 36분 경고사격을 가했다. 북한 경비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수리 325호에 조준사격을 가했다.

참수리 325호는 비상사태를 발령한 후 대응사격을 가해 북한 경비정 한 척을 박살냈다. 결국 11시 40분 북한 경비정 등산곶 383호는 함포와 기관포가 부서진 채로 정지, 다른 경비정의 예인을 받으며 후퇴했다. 이 해전으로 북한군은 3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참수리 325호의 승리는 2004년 바뀐 교전수칙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리저리 ‘기동’을 하지 않고 받은 만큼 돌려주기로 해서라는 것이다.

승리한 해전은 기념할 가치가 없는 걸까?연평해전에서 승리한 지 13년, 제2연평해전을 겪은 지 10년, 대청해전에서 승리한 지 3년이 지난 2012년 6월. 어느 언론에도 1999년 연평해전 승전 기념이나 2009년 대청해전 승전 기념 소식은 안 보인다. 군에서는 보도자료도 안 나왔다.

2011년만 해도 해군 각 함대는 제1연평해전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이 승전기념식도 사실 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7년 뒤에야 처음 열린 것이었다. 해군 관계자는 “한동안 승전 기념행사를 하다 제2연평해전(서해교전)으로 우리 장병들이 숨진 뒤 초점이 옮겨갔다. 올해 승전 기념식은 부대 자체 행사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입만 열면 ‘자칭 애국자’라는 정치인들도 우리 장병들이 숨지거나 다친 ‘열 받는 일’은 언급해도 우리 군이 ‘통쾌하게 이긴 일’에는 별 관심 없어 보였다.

최근 종북 논란 중인 새누리당과 민통당도 ‘승전’에는 별 관심이 없다. 특히 민통당은 盧정권이 들어선 뒤 2002년 서해교전으로 숨진 장병 이름을 몰라 곤돌리자 라이스 장관에게 망신을 샀던 경험 때문인지 NLL에서 우리 해군이 승리한 것에 대해 언급조차 않는다.

이런 ‘자칭 국가지도자’들이 우리 군인과 국민들의 사기와 자긍심을 깎아 먹는다. 올해 11월 10일부터 승전 기념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북한의 대남사업부도 우리의 승전 기념행사를 예의주시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 대북심리전’이다.

전경웅 객원기자·뉴데일리 기자 enoch205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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