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인터뷰] 김일주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이사장
[미래인터뷰] 김일주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이사장
  • 미래한국
  • 승인 2012.07.2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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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정착 운동이 통일의 시작입니다”

북한을 이탈한 주민이 2012년 7월 현재 2만4000명을 넘어섰다. 북한이탈주민이 입국하면 하나원에서 3개월 동안 교육을 받는다. 적응훈련을 받는다곤 하지만 수십년간 동토의 땅에서 살다가 자유대한민국 사회에 편입하면 북한이탈주민들은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우리 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총괄하는 단체가 여의도에 위치한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다. 2010년 11월 22일에 출범한 이 재단에는 김일주 이사장 이하 6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그 가운데 10명은 탈북민들이다.

‘실향민’ 출신의 최고령 최고위 공직자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일주 이사장은 2005년부터 북한이탈주민후원회장으로 일하다가 재단이 출범하면서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올해 79세로 대한민국 공직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김 이사장은 자신이 실향민이기에 탈북민들의 심정을 잘 안다고 했다.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인데 1950년 10월 국군이 우리 마을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소를 잡아서 대접했어요. 그때 17세의 나이로 국군에 입대했습니다. 흥남 철수 때 부모와 생이별하고 내려왔으니 나도 탈북민이지요.”

 

남한에 와서 육군으로 복무하고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병들은 제대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1951년에 제대했다. 갈 곳이 없었던 그는 천안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열심히 일해도 제대로 세경을 받지 못하자 KLO(주한 첩보연락처)부대에 입대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서울 여의도를 지나다 미군 초병에게 잡혔고, 자신의 배낭에 담긴 링컨책을 본 미군으로부터 “나중에 링컨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되라”는 말을 듣고 이 땅에서 열심히 살기로 결심했다.

그로부터 서울 명동 모나리자 다방 청소부, 퇴계로 자동차 정비공장 정비원, 택시기사 등 안해 본 일이 없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휘문고에 입학해 네 살 적은 동기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고교 시절 고향 선배인 건국대 설립자 유석창 박사의 눈에 띄어 건국대에 진학, 대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4·19 때 청년학생연맹 조직해 당시 건국대 야간대학생이던 경무대 경위를 비롯한 몇몇 인사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 하야 권고를 했고 자유당 청사를 점령했다가 종로서에 투옥되기도 했다.

김일주 이사장은 1954년부터 농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한국농촌문화연구원을 설립해 농민교육을 실시, 새마을운동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전국 3600개의 마을에 마을문고를 설치한 장본인이다. 당시 활동은 MBC TV ‘농촌 혁명아 김일주’라는 다큐멘터리로 제작됐다. 1969년부터 월간 <농민문화>를 창간해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폐간될 때까지 발간하기도 했다.

1968년 12월에 자신의 땅을 희사해 건립한 농민교육원이 재단법인 한국농촌문화연구회, 직장새마을교육원 등으로 변모했다가 현재의 한국지도자아카데미로 정착됐다. 한국지도자아카데미는 일본의 마쓰시다 정경숙을 본떠 만든 지도자 교육기관으로 김일주 이사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이다. 재산을 아카데미에 다 희사하고 현재 땅 한 평 없지만 행복하다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농촌운동 시작, 새마을 운동 모티브 제공

“급변하는 시대에는 경험만큼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21세기 정보, 지식, 산업사회에서는 자발성, 창의성, 열정을 갖춘 인적 자원의 아이디어에 의해 기업의 흥망이 좌우됩니다. 아카데미에서 개인의 성장, 조직의 변화, 사회의 혁신, 민족의 미래를 주도하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리더십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아카데미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중 국가로부터 부름을 받아 2005년부터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정착지원이 이뤄진 것은 ‘국가유공자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제정된 1962년부터이다. 그후 1978년 ‘월남귀순용사 특별보상법’, 1973년 ‘귀순북한동포보호법’에 따라 지원이 이뤄졌고, 1997년에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통일부 산하의 북한이탈주민후원회가 출범했다.

 
“2005년에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전화를 해서 고향 후배들을 위한 일이니 거절하면 안 된다며 후원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나도 실향민이고 탈북민이나 마찬가지니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맡았지요. 당시 서울 종로구 구기동의 이북5도청 내의 방 한 칸을 사용하고 있었고 직원 5명에 연간 예산은 3억700만원이었어요. 후원회를 맡고 보니 질서가 전혀 안 잡혀 있었어요. 그때부터 아무리 작은 물건을 구입하더라도 반드시 영수증을 보관하는 등 철저하게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탈북민들이 드나들기 편한 장소를 물색해 서초구 반포로로 사무실을 옮겼다. 곧바로 전경련과 소망교회로부터 4000만원을 지원받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인맥을 총동원해 후원회 예산 증액을 신청했다. 당시 김용갑, 김원웅, 박진 등 외교통상위 소속 의원들이 초당적으로 후원회를 지원해 첫해에 17억 원으로 증액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탈북민들이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하나회에 강연하러 가면 급할 때 연락하라며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지요. 밤 12시건 새벽이건 탈북민들이 시도때도 없이 전화했어요. 그러면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두 다리를 절단한 환자, 중증 치질로 고통을 겪는 환자 등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김 이사장은 사비를 들이거나 그간의 인맥을 총동원해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열심히 일해도 불평을 늘어놓거나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최근에도 강연시간에 계속 떠드는 사람이 있어서 몇 번이나 주의를 주자 오히려 화를 내며 김 이사장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한다.

“보위부 장교 출신인데 북한에서 대우받다가 여기 와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힘들었던 거죠.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얼마 후에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김일주 이사장은 북한이탈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의식의 전환이라고 진단했다.

“우리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의식을 전환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북한에서의 지위를 잊고 빨리 한국 사회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전반적으로는 우리 민족의 유전자 유산이 우수하기 때문에 문제없어요. 대부분의 북한이탈주민들은 우리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북한이탈주민후원회 회장으로 일할 때 3억700만원이었던 예산을 62억원까지 증액하면서 후원회 활동을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감사원에서 감사를 나온 겁니다. 예산이 많아지면서 사업 규모가 커지자 자리가 욕심났던지 누군가가 고발을 한 거지요. 며칠 동안 꼼꼼하게 감사를 했는데, 하나도 위법한 사실이 없었어요. 하나원에 드나들 때 차 기름값도 내 돈으로 냈으니 꼬투리 잡힐 게 없었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한에 내려왔고, 내 재산을 다 희사했는데 공금을 건드리겠어요? 나중에 나를 고발한 사람이 나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참 씁쓸하더군요.”

3억 예산으로 출발, 재단 발족 후 260억으로 증액

탈북민이 늘어나 관련 업무가 폭주하자 정부와 국회는 ‘북한 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2010년 3월 북한이탈주민후원회를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으로 승격시켰고, 확실하게 검증받은 그가 초대이사장 자리에 앉았다. 2012년 예산은 258억원에 달한다.

“재단이 출범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이탈주민들이 언제든 고충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24시간 콜센터를 개설한 거예요. 작년 한 해에 콜센터로 7000여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밤중에도 나한테 전화가 많이 왔는데 콜센터 개설 이후로 전화가 안와서 편하게 잠들지요.”

그럼에도 그는 힘든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기저기 후원해줄 사람들을 물색하느라 바쁘다. 예전과 비교하면 예산이 엄청나게 늘었지만, 그만큼 탈북민 숫자도 많아져 쓸 곳이 넘쳐난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 북한이탈주민의 숫자는 연간 몇 십 명 단위였으나 2000년 1000명, 2006년 2200명, 2007년 2500명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2010년부터 조금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매년 2000명 넘게 입국한다. 재단이 출범한 이후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지원을 하게 됐다. 생활안정 및 사회 적응 지원, 취업 및 직업훈련 지원, 정착 교육 및 전문인력 양성에 가장 많은 예산이 배정된다.

우리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문직에 진출하거나 자영업에 성공해 훌륭하게 안착한 탈북민들이 많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학생들도 적응이 대단히 빠르다고 말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생활력이 강해서 분위기 조성만 잘되면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단히 희망적으로 봅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일본 동경대와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뛰어난 학생들도 있습니다. 대단히 적응을 잘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2011년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이탈주민들의 실업률(12.1%)이 일반국민의 실업률(3.7%)보다 3배가량 높다. 김일주 이사장은 사회적기업이 계속 늘어나는 데다 귀농해 성공을 거둔 케이스도 많아 앞으로 실업률이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사회적기업에서 열심히 일하는 북한이탈주민이 많습니다. 송도에스이의 경우 120명 직원 가운데 41명이 북한이탈주민입니다. 작년과 올해 29세대가 귀농해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횡성에서 고사리 농사를 짓는 분도 있고 주문진에서 개사육에 성공한 분도 있습니다. 오리 사육에 성공을 거둔 분들도 있습니다. 귀농을 계속 지원할 계획입니다.”

출범 2년을 맞은 재단은 감사팀을 신설해 상시 감시를 하는 등 조직개편을 했다. 아울러 이탈주민을 더욱 잘 지원하고, 이탈주민이 사회와 잘 화합할 수 있도록 하는 업무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초기 정착 및 취약계층 생활안정 지원을 특별히 강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거주지에 도착하면 모든 게 낯설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2주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생활안정키트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휴대용가스레인지, 라면, 쌀, 통조림 등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 있어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는데 무연고자 납골안치 지원을 비롯해 무연고 탈북청소년 그룹홈, 여성 쉼터, 산모 도우미 파견 사업, 전문상담사 파견 등 세심하게 도우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156명의 중환자가 있어서 각별히 돌보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외부의 취업전문기관과 공동으로 취업지원센터를 설치해 취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청소년 장학 및 주민교육지원, 매체 홍보, 실질적인 지원을 위한 정확한 실태조사와 패널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전화를 비롯한 다양한 통로로 북한의 친족들과 연락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상이 이들을 통해 고스란히 북한에 전해지는 셈이다. 요즘 북한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최근에 북한의 친척과 통화를 했을 때 “현재 북한은 쌀이 있다고 해도 나무가 없어서 밥을 못해먹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통일기금 조성과 문화운동이 과제

김일주 이사장은 다가올 통일을 위해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회에서 등한시하고 있는데 반드시 통일기금을 조성해야 합니다. 50조에서 100조 정도 적립돼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휴전선을 확실히 지키는 상태에서 민간이 북한과 교류를 해야 합니다. 투자를 원하는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가서 개성공단 같은 공단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북한이 속히 농업혁명을 실시해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 같은 경제상황에서 통일되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국민소득 3000달러로 올라가면 휴전선을 열어놓아도 내려오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김 이사장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문화교류를 꼽았다.

“통일은 언제고 우리에게 닥칠 일입니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역사 풍습으로 동화되면 통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화운동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독일은 기독교 문화가 기초가 됐습니다. 독일은 베를린으로 집중하고 있는데 우리는 수도를 분산시키고 있어서 걱정이죠.”

김일주 이사장은 독일 통일에 동독이탈주민 57만 명의 역할이 컸다며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 정착이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이승재 기자 fotolsj@futurekorea.co.kr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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