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0주년 특집 - <미래한국>이 걸어온 길
창간10주년 특집 - <미래한국>이 걸어온 길
  • 미래한국
  • 승인 2012.07.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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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역사를 향해 돛을 올리다

“아무래도 신문을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2001년 5월 김상철 변호사는 서울교회 이종윤 목사를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김 변호사의 말에 이종윤 목사는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상철 변호사는 최연소 서울시장으로 발탁됐다가 야당의 모함성 언론플레이로 7일만에 시장직에서 물러났다. 신문들은 있지도 않은 그의 부동산 투기혐의를 대서특필하고 있었고, 그는 구구절절 변명하는 대신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10년이 다돼 오는 지금 난데없는 신문이라니…그것도 언론과는 관계가 없는 목사와 의논하려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가 체험했던 언론의 파괴력 때문인가. 이종윤 목사는 당장 뜬금없이 느껴지는 김상철 변호사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어떤 신문을 만들겠다는 건가요?”“기독교적 가치를 담은 신문입니다.”

이종윤 목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독교 가치를 담은 신문이라니...언론 선교사업을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그러나 김상철 변호사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과거 언론이 자신을 모함했던 억울함 때문에 신문을 만들려는 것도 아니었고, 기독교 선교사업을 위해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한 가지 결정적 이유는 1999년부터 시작한 탈북난민보호 유엔청원 서명운동에 1천180만명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국민들이 참여했고 그 서명이 유엔 등 국제기관에 전달됐음에도 국내 언론들이 북한인권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상철 변호사는 우리 언론계에 제대로 된 신문이 없다고 생각했다. 권력을 쫓고 거기에 아부하는 언론들은 있어도 사랑과 정의를 추구하는 언론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상철 변호사가 기독교적 가치를 담은 신문을 만들겠다는 것은 바로 성경의 가르침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크리스천의 사회적 소명을 추구하겠다는 결심이었다. 이종윤 목사는 그때 김상철 변호사에게 “성경적 가치를 담은 언론이라면 나도 적극 돕겠다”고 이야기 했다.

‘성경적 가치로 세상을 바라보자’

미래한국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른 언론과는 달리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빛과 소금의 사회적 영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고, 서로를 헐뜯고 비난하기 보다는 대안을 제시하는 밝고 따듯한 저널리즘을 목표로 했다. ‘사랑으로 화합하자’라는 사시(社是)의 철학은 바로 그런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성경적 가치는 구체적으로 우리 현실을 바라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또 다른 정치철학과 만나야 했다.

김상철 변호사는 뜻을 같이 할 동지들을 찾아 나섰다.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문용린 서울대 교수, 당시 세계지리학회 회장으로 있던 류우익 서울대 교수(현 통일부 장관), 이승만 연구를 통해 현대사를 재조명하고 있던 유영익 연세대 교수 등이 미래한국 창간에 김상철 변호사와 뜻을 같이했다. 이들은 김 변호사의 신문 창간 취지에 전적으로 공감했다. 특히 대한민국에 참다운 보수주의의 가치를 지닌 신문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성경적 가치와 진정한 보수주의 가치를 지닌 매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두고 매일 토론에 토론을 이어갔다. 문용린 전 장관은 이렇게 회고한다.

“김상철 변호사는 ‘제대로 된 보수철학을 가진 언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치나 경제, 사회 문제에 해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솔직히 김대중 정권 당시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지식인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2001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대한민국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1년전인 2000년 1월에는 종북 성향의 전교조 합법화에 힘입어 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6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은 좌파와 종북세력들에 의해 연방제 통일지지 여론을 대세로 만들었다.

햇볕정책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안보정신을 뿌리째 흔들었다. 무엇보다 철저하게 김정일의 주도 속에 이뤄진 평양회담에서 국민들은 김정일이 연출한 ‘쇼’를 넋나간 표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동시에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통해 ‘우리민족끼리’라는 슬로건으로 천문학적인 경협자금이 북에 제공되기 시작했다.

2001년 9·11테러 사건과 미국의 아프간 공격은 급격한 세계경기의 위축을 불러왔고 국내에도 그 여파는 컸다. 이러한 와중에도 당시 김대중 정부는 김정일의 서울 답방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좌.우로 갈렸고 보수진영 내에서는 좌절감이 팽배했다. ‘보수’하면 단박에 ‘수구세력’으로 매도되던 시절이었다.

김상철 변호사와 미래한국의 창간 주역들은 그러한 시대일수록 진정한 보수가치의 재발견이 필요하다는 데 뜻을 함께 하고 있었다. 김상철 변호사는 보수적 가치와 성경적 가치를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두고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다. 그렇게 도달한 결론은 시사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필요성이었다.

즉 매회 우리 사회의 주요 사건과 이슈를 정통적인 보수의 시각에서 독자들에게 해석해 줘야 한다는 김상철 변호사의 제안에 모두가 공감했다. 그러한 필요성은 교회 사역자들에게 더 절실했다. 제한된 팩트만 알았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목회자들이 익숙하지 않다는 점에 모두들 동의했다.

문용린 교수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 보자.“그래서 당시 사회적 사안과 이슈를 정확하게 성경과 보수주의 관점에서 해석해 주는 언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메시지를 가지고 교사가 학생에게, 목사가 성도들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심도 있게 읽을 수 있는 주간지 형태로 창간이 논의됐던 것입니다. 그 후 매일같이 기획회의와 모임이 있었고 거기서 미래한국의 사시(社是)가 다듬어졌죠. 당시 목표는 잘 정제된 보수의 시각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시민 주주 1000명으로부터 모은 자본금 10억원

2001년이 넘어갈 무렵, 이 새로운 신문의 나아갈 길은 그렇게 정해졌다. 형태는 신문판형 주간지로 결정됐다. 제목이 문제였지만, 김상철 변호사가 설립해 주도하던 한미우호협회에서 발행하던 협회지 ‘미래의 세계’에서 보듯 ‘미래’는 이미 당시 김 변호사가 간직하고 있던 키워드였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다룬다는 차원에서 ‘미래한국’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하지만 모두가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창간 자금을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주주 1000명으로부터 100만원씩, 10억을 유치한다는 계획을 짰지요.”

창간 초기 전무로서 회사의 경영실무를 책임졌던 정지태 이사((주)카리스 대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하지만 1천명의 주주라는 컨셉은 일반 언론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어디서 1천명이나 되는 주주를 모집한단 말인가? 하지만 김상철 회장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 폭넓은 사회활동을 통해 형성한 많은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고 특히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CNKR)의 1천만명 서명운동을 통해 전국적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형성됐었다. 이러한 운동성과 함께 이듬해인 2002년 새해들어 바야흐로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 1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북한과 이라크, 이란을 ‘惡의 축’으로 지목했다. 좌파 언론들은 노골적으로 반미선동을 부추겼다. 당시 미래한국은 1천명의 주주를 모집하기 위한 운동에 들어갔고 반응은 뜨거웠다. 각계 오피니언 리더들은 물론 전국의 이름 없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기꺼이 주주로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기업인들도 있었고 시골의 농부도 있었으며 군인과 교사, 상인들도 있었다.

미래한국에 대한 그러한 지지와 성원은 역설적이게도 당시 북한에 끌려다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꿔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결국 자본금 10억이 계획대로 모집됐고 그해 6월 15일 미래한국은 드디어 창간호를 발간했다. 당시 세계신문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이렇게 축사를 했다.

성찰과 대안 언론으로 출발

세계적으로 큰 신문이라고 꼭 영향력 있는 신문은 아닙니다. 미래한국신문이 주간지인 독일의 디 자이트(die Zeit), 스위스의 노이에 주리히 짜이퉁(Neue Zuriche Zeitung)처럼 우리나라의 메이저 신문을 향도(嚮導)하는 신문이 되기를 바랍니다.”2002년 6월 27일 미래한국 창간 기념 리셉션에 행사에는 미래한국신문 임직원을 비롯한 500여명의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해 창간을 축하했다.

당시 주요 참석자들은 미래한국에 무엇을 주문했었던가. 자리에 참석한 정원식 전 국무총리는 “과거에 얽매이던 의식구조를 개혁하는 미래지향적 신문의 창간을 축하한다”면서 “과거를 미래라는 틀과 연결해 새롭게 승화시키고 발전시키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김준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도 축사를 했다. 김준곤 총재는 ▲전통우방과의 친선을 지킬 것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지향 ▲정치, 경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노력할 것 ▲통일을 지향하고 민족성을 보존할 것 ▲월드컵의 하나 된 힘으로 우리나라가 세계의 대국으로 거듭나는 데 기여하는 ‘예언자적 신문’이 될 것을 당부했다.

이러한 당부에 김상철 발행인은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미래한국신문은 진리가 있고 역사의 주재자가 있음을 믿는 신문입니다. 비판하는 신문이 아니라 위로하고 희망을 보여주는 신문을 통해 한국을 강대국의 반열에 진입시키는데 반드시 기여할 것입니다.”

창간호에 김상철 발행인은 ‘한국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창간사를 썼다. 창간 당시 미래한국의 방향은 비판이 아니라 성찰과 대안이었다. 미래한국은 그렇게 순조롭게 탄생했고 많은 인사들의 성원과 축하를 받으며 대안언론이라는 항해의 돛을 올렸다. (계속)

/미래한국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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