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행] 비극의 도시, 평양에 가다
[특별기행] 비극의 도시, 평양에 가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8.0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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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편집위원 커크의 9번째 북한 방문기

북한에서 벌어지는 기적 중 하나는 북한당국이 북한주민뿐 아니라 외국방문객들을 통제하는 기술이다.

당신은 북한의 수도 평양에 있는 2, 3개의 최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식사를 하고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또 1968년 동해안에서 나포된 미 해군 정찰선 푸에블로호와 같은 전시물이 진열된 박물관이나 여러 기념관들을 둘러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하나의 기적(?), 통제기술

김일성 출생지와 그의 삶을 찬양하는 박물관 방문은 필수다. 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일이 죽은 후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은의 사진을 담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를 접거나 던지는 것은 북한에서 금지돼 있다.

농장에서부터 주택건축 현장, 공장 등 모든 장소는 김씨 왕조의 현장 지도를 보여주는 유적지다.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신격화 작업은 총체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나이가 30도 되지 않고 통치 경험이 전무한 김정은이 이런 패턴을 바꾸거나 바꿀 의사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북한은 몇 년 전에 비해 좀 더 자유롭고 개방적인 것처럼 보이나 여전히 일반 북한사람들에게 말을 걸 수 없고 창문을 통해 보이는 것처럼 정말 진열대 위에 상품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상점이나 시장에 걸어들어갈 수 없다.

북한 언론들은 김정은이 ‘선군(先軍)’ 정책을 지지하고 가끔 한국을 비난하는 말을 한 것을 갖고 그의 선조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과장되게 칭송하고 있다. 1953년 한국전 정전협정이 서명된 장소인 판문점에서 만난 한 북한 육군 대위는 “우리는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는 “핵무기는 우리를 다른 나라들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준다. 우리는 누구도 침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대위는 최근 원수가 된 김정은의 말을 책임감 있게 인용했다.

그는 “미국 측이 다른 전쟁을 원한다면 그들은 정전이 아닌 항복문서에 서명해야 할 것”이라며 “우리는 북한식으로 그들을 격퇴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양으로 돌아와 망치, 낫, 붓으로 상징되는 ‘주체’를 기념하는 탑에서 만난 한 여인은 북한의 주적인 미국과 한국, 그리고 1945년까지 35년 동안 한반도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의 ‘위협’에 맞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했다. 그녀는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라며 “경제에 투자하면 우리 생활은 나아질 것이다. 하지만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핵무기가 우리를 지켜준다”

당신은 우리가 ‘홍보요원’이라고 부르는 북한 안내자가 소개하는 사람들 이외에 다른 북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인터뷰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북한 당국이 금지하는 어떤 것도 북한에서는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북한에서 불길한 권력 다툼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런 소식은 정작 북한보다 한국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당신은 과거에 깊이 빠져 있고 실패와 뿌리 깊은 문제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곳이 북한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중국제 관광버스는 판매할 물건이 거의 없는 상점과 시장들, 빨간색 배경에 하얀색 한글로 김씨 왕조의 3대째 후계자인 김정은을 칭송하는 대형 광고판들 사이를 지나간다. 당신이 김정은이 어디에 살고 있고, 주거지와 사무실이 어디냐고 물으면 “평양 안에 있다”는 대답만 들을 것이다.

노동당 본부가 어디냐고 물으면 대답은 ‘비밀’이다. 노동당 본부는 수백개의 방과 3천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인민대학습당과 대동강 사이에 있는 김일성 광장에 접한 건물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보도와는 달리 평양은 내가 4년 전 방문했을 때보다 달라진 것이 많이 없었다. 물론, 평양에는 번쩍거리는 고층의 아파트들이 들어섰고 4년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약간의 교통정체도 있었다. 제복을 입은 여성 교통경찰들이 있지만 교통신호등도 일부 설치됐다.

목탄 트럭이 다니는 ‘목가적 도시’

하지만 구 소련과 동구의 위성국가들의 공산주의 정권들이 붕괴되기 전인 동독 시절에 만들어진 시가 전차는 여전히 평양에서 많은 사람들을 싣고 숨겨져 있지만 붕괴 직전의 건물들로 가득차 있을 빈민촌으로 이어진 여러 골목길과 연결된 거리를 따라 천천히 덜컹거리며 가고 있었다.

신규 아파트 단지와 간선 도로들 이외의 거리에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북한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계급 및 사회적 격차로 가득찬 현실은 숨길 수 없었다. 빈부격차는 없는 자들이 가진 자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위험을 안고 있다.

계급 격차는 평양을 떠나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을 지나 자전거나 소가 끄는 수레가 주요 운송수단인 농장지역을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북한에서 2번째로 큰 도시로 산업의 중심지인 함흥으로 가는 길에서 당신은 사진을 절대 찍지 말라는 명령을 또 받을 것이다. 2년 전만해도 함흥은 외국인들에게 다소 개방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지역은 많은 비밀과 가난, 굶주림의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길거리 모습은 나무를 태워서 움직이는 목탄 트럭들이 내뿜는 검은 연기들이 있지만 믿을 수 없게 목가적이다. 북한 안내원들은 이것도 사진 촬영을 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한다. 천연색의 멋진 장면이지만 북한당국자들에게는 불편한 것이었다.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옥수수와 채소가 담장 높이까지 자란 집들을 보았다. 대규모 ‘협동 농장’에서 얻는 수확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를 먹일 만큼 충분하지 않자 생존을 위해 ‘개인 부지’에서 각자 식량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버스에서 내려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안내원은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한때 김일성이 방문했던 시범 협동농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볼 수 있는 김씨 왕조를 칭송하는 많은 기념장소 중 하나다. 이곳에서도 농부들은 먼 들판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함흥산업지역을 지나가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거의 파괴됐던 한국전쟁 직후에 건설된 노쇠한 공장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도 당신은 북한이 석회암을 통해 비닐을 생산하는 공장단지나 기계를 제작한다는 공장 등 어떤 것도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을 것이다. 이 공장들은 북한이 한국전쟁 후 아직도 어두운 시간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버스는 일제 식민 지배 때 세워진 비료공장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공장 매니저는 이 공장이 일본사람들이 세운 것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고 북한에서 만든 기계로 매년 70만톤의 비료를 생산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비료와 서해안의 또 다른 공장에서 생산되는 비료로는 나라 전체에서 필요로 하는 양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북한은 주로 중국으로부터 오는 외부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금강산 관광지역까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녹슨 철로를 망치로 두드리며 고치는 ‘자원봉사’ 북한주민들을 보았다. 현대 장비들이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한데 북한에서는 사람의 노동력이 주된 에너지원이다.

황량한 금강산

거대한 대리석 봉우리 아래 있는 금강산 관광지는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4년 전 금강산 관광을 온 한국의 한 중년여성 관광객이 새벽 여명을 보기 위해 관광지역 밖으로 벗어났다가 북한 경비병의 총에 맞고 사망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인들의 금강산 관광을 금지한 후 금강산 관광지의 경기회복은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의바르고 밝은 성향의 안내요원은 그 한국여인이 경비병의 고함과 경고사격을 무시하고 ‘군 기지’쪽으로 걸어갔다고 해명했다. 그는 이 대통령에 대해서는 “나는 총을 쏘지 않고 맨주먹으로 그를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금강산 관광지 면세점에서 만난 중국과 단기 계약으로 고용된 직원들은 사업이 안 된다고 안타까워했다. 거의 거래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 관광객들을 오도록 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홍콩 매니저인 케빈 호는 웃으면서 “중국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는다. 당신들이 오늘 유일한 고객들이다”고 말했다.

금강산의 멋진 봉우리들 아래 있는 구룡폭포로 가는 길에서 김씨 왕조를 영웅처럼 숭배하는 증거들을 볼 수 있었다. ‘영원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칭송하는 글들이 산 대리석들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후계자인 김정은에 대한 글들은 없었다.

한 안내요원은 즉흥적으로 김정은은 지금 너무 바빠서 등산을 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핵무기와 미사일은 원근 적들의 위협을 억지하는 데 필요하다고 열정적으로 말하면서 북한 정권의 정책을 옹호했다.

정권으로 인해 물려받은 비극

김일성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싸우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평양에 있는 순교자의 무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써 있다. “고귀한 혁명정신은 사람들의 마음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수백명의 북한 군인들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 기념관이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나이가 18~19세였지만 12~13세로 처럼 보였다. 북한 주민들의 성장을 멈춘 만연한 굶주림의 결과다. 나는 9번째 북한을 방문했지만 주민들 가운데 한번도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부자처럼 뚱뚱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기념관에서 목례를 하고 존경을 표하기 전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의 상관들이 함께 있었지만 일부는 웃고 있었고 일부는 착한 마음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어린 북한 군인들을 보면서 실제로는 대부분 군기지가 아닌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이 자랑하는 120만의 군인들이 제2의 한국전쟁을 할 준비가 돼 있거나 또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누구도 자원을 핵무기와 미사일에 낭비하면서 북한의 명소들을 새로운 지도자와 그 선조들을 칭송하는 장소로만 쓰려는 정권 때문에 국가가 물려받고 있는 비극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북한에서 본 모든 굵을 글씨체의 구호들은 이런 실패를 숨기려는 것에 불과하다.(미래한국) 

번역 / 이상민 기자 proactive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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