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중국에 맞설 수 있어야 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8.2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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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2002년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은 사고였다. 그런데 나라가 온통 뒤집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래도 사고가 참혹했던 만큼 그 심정만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미군 측의 대응도 매우 서툴렀으니 백번 이해가 되는 사태였다고 해두자.

다음, 2008년의 광우병 촛불소동. 이것은 명백히 기만적 선동의 결과였다. 이성과 지성이 조롱당하고 거짓과 광기가 거리를 뒤덮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명박 정부의 섣부른 일처리 탓도 있었다고 해두자.

당시 나라를 뒤흔들었던 이들 두 경우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이다. 일본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한국민이 그냥 넘어가지 않는 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미국과 관련된 경우에도 그런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때문인가? 얼마 전 평택에서 미군 헌병과 우리 민간인 몇몇 사이에 약간의 충돌이 있었을 때, 미군 측은 너무도 신속하게 사과부터 하고 나왔다.

미국에 핏대 올리고, 중국에 꼬리 내리고

그런데 상대국이 일본도 미국도 아닌 중국으로 바뀌면 희한한 모습이 보인다. 2008년 4월 27일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에서 성화 봉송이 있었을 때였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중국인들 6천여 명이 떼를 지어 폭력 시위를 감행했다. 말이 시위지 난동이었다.

이들 중국 폭도들에 의해 우리 시민들은 물론 경찰들도 집단 구타를 당해 중상자까지 나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중국 언론은 “서울에서 애국심의 물결이 일었다”고 보도했다. 중국 외교부도 부상자들에게 위로만 전했을 뿐 별도의 사과는 하지 않았다. 중국의 떼거리 폭도들은 겨우 2명이 그나마도 입건되는 것에 그쳤을 뿐 다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반발한 몇몇 보수우파 시민단체들이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에 나섰지만 더 이상의 동참은 없었다. 특히 야당과 좌파 시민단체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그런데 이렇게 외면하던 자들이 며칠 뒤인 2008년 5월 2일부터 시작된 광우병 난동에는 앞 다퉈 나서기 시작했다. 상대가 미국이라서인가?

FTA도 마찬가지다. 한미 FTA에 그렇게 난리를 치던 자들이 한중 FTA 얘기가 나오는데 일언반구도 없다. 한중 FTA는 우리에게 너무도 이득이라서? 천만에. 지금도 값싼 중국 공산품과 먹거리들이 휩쓸고 있다. 한중 FTA가 되면 특히 우리 중소기업과 농어민에는 거의 치명상이다. 그런데 말끝마다 중소기업과 서민을 앞세우는 자들이 한중 FTA에 입을 다물고 있다. 상대가 중국이라서인가?

이런 희한한 경우는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다. 그런데 최근 중국과 관련해 일어난 어떤 일은 그냥 이상한 정도를 넘어선다. 이것은 중대 사태다. 바로 김영환 씨 구금 고문 사건이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의 안전 수호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최종적인 임무, 다시 말해 국가의 존재 이유의 알파요 오메가는 그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어떤 나라가 이유 없이 자국민에 위해를 가하면 심하면 전쟁을 불사할 수도 있다. 심지어 상대가 정당한 이유를 가졌다 해도 때로는 가차 없이 대립각을 세우기도 해야 하는 게 국가다.

그런데 우리 국민이 남의 나라에서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이 불법적 구금에 고문까지 당했다. 이에 맞서지 않는 것은 국가로서는 존재 이유를 포기하는 것이며, 국민으로서는 독립된 주권국가의 일원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유야무야 넘기면 오늘은 인권 운동가 한 명이 당하지만 다음에는 나라가 통으로 밟히는 수가 있다. 외교 당국자가 한국을 보고 “미국만 아니었다면 진작 손봤을 것”이라고 하는 중국이다.

자존에 대한 도발에 단호히 대응하지 않으면 자존 자체를 박탈당할 수 있다. 올림픽 메달에 열광하며 태극기를 흔든다고 애국이 마무리되는 게 아니다. 애국은 감정 이상의 냉철한 자존 의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턱없이 미온적이며, 국민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는 식의 분위기가 적지 않다. 왜 이런 지경인가? 여기에는 아무래도 오랜 역사를 거치며 한국인의 정서 속에 알게 모르게 내화된 일종의 ‘차이나 포비아(China Phobia)’가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고대 중국의 문명에 대한 존경심? 아니다. 조선의 소중화 의식과 사대는 그 어떤 말로 꾸미든 결국에는 거대 중국의 힘에 대한 체념이 심리적 뿌리다. 이를 부인한다면 자기기만이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것도 자신을 속이는 핑계다. 한국은 일본에 대해 더한 이해관계로 엮여 있을 때도 애써 자세를 낮춘 적이 없다. 심하게는 그 이상인 미국도 들이받곤(?) 했던 나라가 한국이다.

최근에야 그랬다고? 아니다. 이승만 때부터 줄곧 그랬다. 사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본질적인 안심의 심리도 깔려 있다. 우선 멀리 있고, 게다가 크고 좋은 땅을 가진 나라다. 굳이 이 땅에 말뚝 박을 이유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안다. 북한이 미국을 군사깡패라고 운운하지만 한국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미국이 깡패가 아님을 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매우 점잖은 문명적 세력임을 안다.

이 점은 심지어 반미 종북 세력들조차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대개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북한에 가서 살 생각은 결코 하지 않지만 미국에는 유학도 가고 여건만 되면 거기서 둥지를 틀기도 한다. 일급 종북분자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윤이상, 송두율 등을 보라. 그들은 평양을 자주 왕래하긴 해도 결코 거기서 영주하지는 않았다.

‘차이나 포비아’를 깨뜨리자

하지만 중국은 그와 다르다. 중국은 힘과 안정을 갖추면 한반도에 대해 결국 언제나 힘을 앞세우는 깡패가 됐다. 그 깡패국가 중국이 돌아왔다는 인식, 이 ‘포비아’가 중국이 거의 행패에 가까운 작태를 벌일 때도 단호히 맞서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를 극복해야 한다.

친중(親中)을 앞세우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순진한 착각 아니면 의도적인 눈속임이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들과 대등한 의미에서의 친(親)의 관계를 가졌던 적이 없다. 중국은 타국과 언제나 수직적 관계만 맺었을 뿐이었다. 자신들이 아래가 됐든 위가 됐든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친중(親中)은 늘 사대종중(事大從中)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었다. 중국을 자극하지 말자, 통일을 위해선 중국과의 우호가 중요하다는 등은 다 쓸모없는 얘기다. 때로는 상대를 충분히 자극해도 그들이 감히 도발을 꿈꾸지 못하게 할 만큼 힘을 키우는 게 국가의 당연한 목표다. 국제정치에선 힘이 없으면 우호도 없다.

순진한 친중론자(親中論者)를 별도로 하자면 종북 친중 반미(從北 親中 反美)는 일치한다는 게 비밀이 아니다. 게다가 순진한 친중론자(親中論)도 결국에는 종북반미(從北反美)에 포섭되기 마련이다. 동양철학을 앞세우다 어느 순간부터 반미로 거품을 무는 어떤 양반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반역적 삼각연쇄 모두를 깨야 한다. 종북(從北) 반대에 그치지 않고, 굴종을 숨긴 위선적 친중론(親中論)도 함께 깨야 한다. 그래야 장차 북한을 우리 품에 온전히 할 수 있다.

물론 통일은 놔두고라도, 중국과 구별된 독립된 문명, 독립된 주권국가의 역사를 이어갈 생각마저도 없다면 안 그래도 된다. 다만 그러려면 그것이 이미 역사적으로 경험했듯이 매우 불쾌하고 더러는 참담한 굴종일 거라는 점은 각오해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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