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선을 통해 보는 ‘제3후보’ 안철수의 운명
역대 대선을 통해 보는 ‘제3후보’ 안철수의 운명
  • 김주년 기자
  • 승인 2012.08.2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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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기세가 무섭다. 안 교수는 SBS ‘힐링캠프’ 출연 이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 다자대결에서도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접전을 벌이고 있다.

<중앙일보>가 지난 8월 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다자구도에서 안철수 원장(35.9%)과 박근혜 전 위원장(36.7%)은 오차범위 내 접전 양상이었다. 안철수-박근혜 양자대결에서도 역시 박 전 위원장이 46.1%로 안 원장(46.5%)과 우열을 가리기 힘든 지지도를 기록했다. (전국 1,500명의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유선전화 및 휴대전화 임의걸기(RDD) 자동응답 방식으로 실시. 오차한계는 95% 신뢰수준에 ±2.5%p)

현재 시점에서 안철수 원장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제3후보’임에 분명하다. 비록 그가 추후에 여론 향방에 따라 민주통합당 등 좌파진영과의 단일화에 응할 가능성이 높더라도 말이다.

민주화 이후 치러진 역대 대통령선거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여야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은 제3의 후보들이 출마했었다.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와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격돌했던 9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현대그룹의 오너였던 정주영 후보가 제3의 정당인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

국민당은 그해 4월 열린 총선에서 31석을 얻어 돌풍을 일으켰고, 정주영 후보는 이 기세를 몰아 대선에서도 16.3%의 득표로 3위를 차지했다. 당시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은 42%, 김대중 후보는 33.8%를 각각 얻었다.

97년 대선, 제3후보가 승패 가르다

97년 대선은 중도우파 성향의 제3후보가 선거 결과를 바꾼 케이스다. 당시 이인제 경기도지사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가장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분패한다. 이후 그는 탈당에 이은 독자출마를 강행, 국민신당 후보로서 대선을 완주하며 19.2%를 득표했다.

국민회의 김대중 당선자(40.3%)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38.7%)의 득표율 격차가 미미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남 및 중도보수층의 지지를 얻었던 이인제 후보의 독자출마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자민련 후보였던 김종필 전 총재가 그해 10월에 김대중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김대중 정권 출범에 큰 역할을 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제3후보의 파괴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민주당 경선에서 흥행돌풍 속에 승리하고 올라온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와 양자대결을 벌일 것으로 전망됐지만, 2002년 월드컵 개최 및 4강 신화의 주역이었던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3자대결 구도가 됐다.

정몽준 후보는 한때 3자대결서도 이회창 후보에 앞서며 당선 문턱까지 갔으나, 2위로 처진 후에는 여론조사를 통한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에 합의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우세했던 정 후보로의 단일화가 유력시됐으나 단일화 결과는 노무현 후보의 승리였다. 이로 인해 정몽준 후보를 지지하던 중도성향 유권자들 중 일부가 노무현 지지로 돌아섰고, 결국 노 후보는 새누리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 있다.

‘통일전선전술’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

이명박 대통령의 압승으로 끝났던 2007년 대선에서도 제3후보는 있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 후보가 그해 10월에 독자출마를 선언하면서 대선은 이명박-정동영-이회창 3자구도로 치러졌다. 이회창 후보는 1997년의 이인제 후보처럼 한나라당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우파의 표를 잠식하며 15%를 득표했지만 이명박 대세론에 흠집을 내지는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제3후보들 중에서 눈여겨봐야 할 인물들은 97년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97년의 이인제 후보, 2002년의 정몽준 후보 세 사람이다. 김종필-이인제 두 사람은 이념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거리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정권의 출범을 도운 결과가 됐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후보도 자신과 정체성이 180도 다른 종북좌익 성향의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를 했다.

김종필 전 총재는 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국무총리로 임명되며 DJP 공동정권을 이어갔다. 그러나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김종필 당시 총리와의 내각제 개헌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여기에 대북정책에서도 두 사람의 생각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결국 2001년 8월에 있었던 ‘만경대 방명록’ 논란을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은 김종필 총재와의 연합정권을 파기했다.

불쏘시개로 이용 당한 이인제

97년 김대중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98년에 국민회의와 당대당 합당을 결행했다. 이후 그는 여당 내에서 유력한 자기 대선주자로 자리잡았고, 2000년 총선에서는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한나라당을 탈당했지만 이념적으로는 중도우파에 가까웠던 그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후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양자대결을 벌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좌익성향이 강한 민주당 당원들 및 그 지지자들은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초반 이인제 후보에 밀리고 있었던 노무현 후보는 이 후보에게 “한나라당 후보로 나와야 할 사람”이라고 공격하면서 좌파세력의 지지를 결집시켰다.

이에 김근태, 유종근, 한화갑, 김중권 경선후보 등이 연이어 후보 사퇴를 선언하면서 좌파의 지지세는 노무현 후보에게로 결집됐고, 그의 경선 승리로 이어졌다. 이인제 후보로서는 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경선 흥행에 기여한 ‘불쏘시개’ 역할만 한 결과가 됐다.

정몽준 후보의 운명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2007년 대선을 한 달 앞두고 극좌파에 가까운 노무현 후보와 여론조사를 통한 후보단일화를 했고, 이에 패하자 결과에 승복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는 정 후보와의 정책합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고, 집권 후에도 정 후보를 고려하지 않은 좌익 노선으로 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에 선거를 하루 앞두고 단일화는 파기됐고, 정 후보로서는 단일화를 통해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에서 아무 지분도 가지지 못했다.

김종필-이인제-정몽준 세 후보들이 김대중-노무현 세력에게 당했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좌익의 트레이드마크인 ‘통일전선전술’을 확인할 수 있다. 통일전선전술은 1차적 목적을 달성한 후 일시적으로 손잡았던 중도·우파세력을 척결하고 순혈 좌파세력만의 정권을 출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안철수의 운명은?

좌익 통일전선전술의 시초는 1940년대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통해 공동의 적이었던 일본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한 후, 공산당은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석권했다. 베트남 공산화 과정에서도 월맹군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던 월남 내 ‘자생 좌익’들은 이후 무참히 숙청을 당했다.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폐기하는 게 공산당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관건은 ‘2012년의 제3후보’인 안철수 원장이 과거의 김종필-이인제-정몽준처럼 좌익 통일전선전술의 희생양이 될 것인지 여부다. 안 원장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2009년 용산 방화사태와 관련해 가해자인 전철연을 두둔하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비난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한 바 있다.

또 2008년 박왕자 씨 살해사건에 대한 북한의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이 없는 상황에서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촉구한 바 있다. 이는 민주당 지지세력을 상대로 자신의 정체성이 좌익에 가깝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주한미군 철수에 이은 연방제 통일을 추진하는 국내 좌파세력의 눈에는 안철수의 정체성과 과거 경력이 만족스럽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안 원장은 좌익들이 증오하는 ‘자본가’이며, 이명박 정부의 위원회에도 합류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통합당과 극좌파로서는 김종필-이인제-정몽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안철수 원장을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불쏘시개’로 활용한 뒤 폐기처분하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좌익 매체들이 ‘안철수 때리기’에 나선 것을 보면 이 같은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감지된다. 프레시안은 지난 8월 2일자 기사 ‘안철수, 2001년 재벌 은행업 진출 동참 논란’에서 안철수연구소의 자회사가 인터넷은행 설립에 출자해 재벌의 금융업 진출에 동참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보도했다.

이에 앞서 노컷뉴스는 7월 30일에 안철수 원장이 최태원 SK 회장의 구명운동에 참여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단독으로 내보냈다. 한국일보도 8월 3일에 안 원장이 대표로 있던 안철수연구소(현 안랩)가 참여한 KLS 컨소시엄이 안 원장이 사외이사로 있던 국민은행 주관 온라인복권(현 로또복권) 사업을 수주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오는 11월경에는 안 원장과 민주당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가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좌파 언론으로서는 안 원장과 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한 ‘순혈 좌파’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원 사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을 수도 있다. 만약 안 원장의 이 같은 좌익 통일전선전술에도 불구하고 야권 단일화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단일화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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