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고는 도요타자동차의 도요타(豊田正一郞) 명예회장이 한 말이다. 그때가 2002년이었다. 사카이야(堺屋太一) 전 경제기획청 장관도 같은 때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일본은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될 우려가 있다.”
이들의 말이 엄살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이는 영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였다. 2002년 2월 16일자 칼럼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에 대해 “변혁의 고통을 싫어하여 화려하게 언덕길을 내려가는 용기 없는 일본, 현재 일본의 불황은 1930년대의 미국 대공황 때보다도 더욱 심각하다”라고 썼다.
2002년도의 평가가 그랬다면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후생노동성 집계에 따르면 일본의 기초생활수급자 수준은 2006년까지만 해도 20만명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올 3월 210만8,000명을 넘어서며 사상최대를 기록했다.
봉급생활자들도 어려워졌다. 일본 국세청이 매년 실시하는 민간급여실태조사에 따르면 2000년 봉급생활자들의 평균 연간 급여는 461만엔에 달했지만 10년이 지난 2010년에는 412만엔으로 8.7%나 줄어들었다. 경제주간 다이아몬드지 조사로는 일본 40세 남성의 평균 연봉은 2000년 640만엔 수준에서 2010년 580만엔 안팎으로 하락했다. 그나마 소비를 떠받치는 것은 연금소득을 누리는 고령자들뿐이다.
올해 초 일본기업들의 실적은 참담했다. 파나소닉 7800억엔, 소니 2200억엔, 샤프 2900억엔 등 일본의 유수의 전자업체들이 엄청난 규모의 적자를 냈고 세계 3위의 메모리반도체업체인 엘피다는 결국 파산해서 정부에 기업회생 신청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의 장기 엔고는 중소기업들을 파탄에 이르게 했다. 여기에 유럽발 재정위기가 덮치면서 일본은 다시 잃어버린 30년으로 가는 것이 아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980년대 헐리우드를 사들이고 맨하탄의 부동산을 사들이던 일본 경제는 왜 침체에 빠졌고 헤어나지 못할까. 여기에는 단지 엔고라는 외부효과이전에 일본 경제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병, 즉 관치경제가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일본은 2차대전 후 세계에서 가장 고도의 성장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그들만의 독특한 기업경영방식이나 정책들로서 모두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위대한 대안으로 여겨졌다. 압축성장으로 표현되는 우리나라도 경제정책의 설정에 있어서는 늘 일본을 모델로 해서 뼈대를 구성해 왔다는 점은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욱일승천’에서 ‘욱일나락’으로
일본은 자본주의 경제발전 단계를 거쳐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선 최후의 국가였다. 한국은 그러한 일본을 벤치마킹해서 20년만에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이뤄냄으로써 모든 개발도상국가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한·일 두 나라의 경제성장에 공통점이 있었다면 관 주도의 경제였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동양적 사고에 입각해 국가의 성장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관치금융과 독단적인 정부의 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갈등을 최소화하며 일본과 한국을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 입각하지 않은 이러한 일본과 한국의 성장모델은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양국가의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경제 위기의 실상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경제의 앞날과도 관계가 있다. 그동안의 벤치마킹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본경제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역시 부실채권 처리 지연 문제였다. 이러한 부실채권이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공통견해다.
누적된 부실채권이 금융시스템 불안과 실물경제 위축을 초래하면서 일본경제는 위기를 거듭해왔던 것. 즉 부실채권 누적 → 금융시스템 불안 → 신용경색 → 실물경제 위축 → 디플레이션 → 자산가격 하락 → 부실채권 증가의 악순환이 계속돼 왔던 것이다.
부실채권으로 인해 금융기관의 중개기능은 계속 약화되면서 기업 투자의욕도 감소했다. 이는 다시 소비자의 소비의욕 감퇴를 심화시켰다. 1990년대 버블붕괴 초기에 일본 정책당국자들은 부실채권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 평가했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그렇다면 버블은 어떻게 발생했던가.
일본은 1984년의 금융자유화 조치, 그리고 1980년대 후반 엔고 극복을 위한 금융완화 등 자유화 조치를 실시했다. 여기에 정부의 잘못된 금융정책이 개입했다. 주가, 지가가 급등해 가던 1987~1989년에 공정이율(재할인율)을 급속히 인하해 유례없는 저금리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버블이 발생했다.
금융완화 조치로 유동성이 풍부해지자 기업과 개인이 토지 주식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대해 금융기관이 무분별하게 대출을 했던 것. 1980년대 말 시중에 자금이 풍부해지자 대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등 은행이탈 현상이 심화되자 일본 정부는 소위 창구 지도를 통해 신용이 약한 중소기업이나 부동산 회사에 은행들이 대규모로 대출을 해주도록 독려했다.
금융정책의 실패로 인한 버블
버블은 부동산에도 일어났다. 당시 모두가 부동산가격이 계속 상승할 것으로 기대하고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다시 부동산을 매입하는 관행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에서는 지가가 토지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세차익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결국 금융기관의 대출리스크 관리가 허술해졌고 부실이 금융기관에 집중돼 갔다.
1990년에 일본에서는 지가급등이 문제로 부각되자, 이번에는 일본 정부가 급격하게 대출규제를 실시하고 금리를 인상했다. 제2금융권에 대해 부동산 대출규제를 실시하는 등 토지대책을 시행했고 일본은행은 장기간의 저금리가 버블을 발생시켰다는 비판을 의식해 금리를 급격하게 인상했다. 그 결과는 거대한 자산 버블의 붕괴였다.
버블의 붕괴는 주식시장에서 먼저 일어났다. 닛케이지수는 1989년 말 3만8,916엔에서 1990년 9월 말 2만222엔으로 폭락했는데 이는 9개월만에 48%가 하락한 수치였다. 지가는 11년 연속 하락해 2002년 1월 공시지가는 피크였던 1991년에 비해 주택지는 36%, 상업지는 76.1% 하락했다.
경제활력의 쇠퇴, 변화의 부적응
버블 붕괴 이후 경기가 장기간 침체되면서 세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재정적자가 급속히 확대돼 갔다. 정부는 경기대책의 일환으로 대규모 공공사업 지출과 감세를 실시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다. 공공지출이라는 케인즈적 처방과 감세라는 공급 사이드 경제학의 뒤섞인 정책이 서로의 효과를 상쇄시켰다. 2002년 31조엔의 재정적자와 국가의 장기채무잔고는 2002년 말 693조엔(GDP의 142%)에 접근해 G7국가 중 최악을 기록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일본에 산업공동화가 진행됐다는 점이다. 생산 코스트의 상승으로 제조거점이 해외, 특히 중국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산업공동화가 진전됐다. 일본 제조업의 해외생산비율은 1990년 6.4%에서 2000년 14.5%로 상승했고 특히 전자산업은 모듈화 범용기술화의 진전으로 해외생산이 급증해 갔다.
문제는 일본이 이 시기에 적극적인 대외개방을 통해 FDI, 즉 해외직접투자를 유치했어야 함에도 규제 중심의 관치행정은 이를 도외시했다. 결국 공동화는 일본의 수출감소, 수입증가와 무역수지 악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결과는 일본 기업들에게 적응력의 저하를 가져왔다. 일본은 1990년대에 들어와 부가가치가 높은 성장산업을 창출하지 못했다. 동시에 한국 등 아시아 각국이 일본의 기술을 따라잡게 돼 일본의 비교우위 분야는 점차 축소되기 시작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신산업 성장을 위한 규제완화나 인프라 정비에 소극적이었다. 기업들도 IT기술 확산 등에 대응해 경영구조를 바꿔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업화사회의 대량생산 조직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일본경제의 신화를 퇴장시키게 만들었다.
이러한 소극적이고 폐쇄적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본의 IT산업이었다. 일본은 세계적 디지털 IT 혁명에 대응해 산업구조를 전환하는 것이 늦었고 특히 국내표준에 집착해 세계조류를 놓쳤다. 그러한 사례로 미국이 컴퓨터 운영체계를 DOS에서 윈도 방식으로 전환할 때, 일본은 NEC 방식에 집착해 윈도 대신 DOS/V를 채택함으로써 제품들은 ‘갈라파고스의 새’처럼 돼 갔다.
통신시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발국들이 휴대폰, 통신, 방송 등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던 시기에 일본은 독자적인 방식을 고집했다. 일본은 독자 휴대폰 방식인 PHS를 채택하여 자국시장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국제화에는 실패했고 1988년 세계 최초로 아날로그 HDTV 실험방송에 성공했지만, 1990년대 미국에서 디지털 방식이 출현하면서 그 기술이 사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일본은 전통적 고용시장을 고집했다. 이는 결국 실업의 급증으로 이어졌다. 지속된 경기침체와 기업수익 악화로 고용흡수 능력이 급격히 약화됐으나 고용시장은 더 경직돼 갔다. 일본의 노동력은 OJT를 통해 특정기업에 필요한 능력 위주로 개발되기 때문에 타기업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범용성이 결여됐던 것. 이는 불황기 노동 이동의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
문제는 청년실업이었다. 일본에는 정년까지 취업할 의사가 없는 ‘후리타’가 증가하는 등 젊은 층의 직업의식이 급속하게 이완되기 시작했다. 후리타(free-timer)란 15∼34세 인력으로 취업을 하지 않고 있거나 취업하는 경우에도 계속 취업기간이 5년 미만인 남성을 말한다. 미혼으로 취업을 하고 있는 여성을 지칭하는 신조어이기도 했다.
책임회피와 합의형 시스템의 실패
일본경제의 실패에는 책임회피 및 합의형 의사결정이라는 시스템상의 문제가 종종 지적된다. 즉 정치, 관료, 기업이 합의를 해야 하는 의사결정시스템이기 때문에 책임을 부과하기 어렵고 또 스스로 책임을 지기를 꺼려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리더가 결단을 하고 개혁을 주도하기 어려운 시스템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은 정부로 하여금 잘못된 방향을 설정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0년부터 시작된 경기침체 이후 지금까지 9번의 내각이(가이후∼고이즈미) 123조엔이 넘는 경기부양책을 실시했으나 경제회생에는 실패했는데 경기부양책 실시 후 일시적으로 경기가 회복되는 듯하다가 경기부양책이 종료되면 다시 침체하는 과정을 되풀이 했다. 그것은 공적 지출로는 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경제 원리가 아니라 장기적 제로섬 게임에 불과한 케인즈 경제이론을 전적으로 신봉한 결과였다.
이러한 공공지출 경기대책이 부실채권 처리나 IT 등 신산업 육성에 쓰이지 않고 자민당 지지자인 건설업계나 농민의 수입을 늘려주는 공공사업에 투입됐던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정책 당국자는 부실채권이 금융시스템이나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잘못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일본경제의 오랜 침체는 일본사회가 갖고 있는 관치중심 경제를 세계화, 개방화에 맞춰 시장경제원리로 전환시키지 못했던 점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 오류의 원인은 낡은 케인즈 경제학에 대한 신봉, 그리고 개인의 선택과 책임이라는 자유주의적 개혁보다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안정 도모가 가져온 결과였다.
문제는 우리 한국사회가 이러한 일본의 실패 모델을 여전히 카피하고 벤치마킹하는데서 한 발 더 나아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원리 마저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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