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구원’, 온몸으로 연기하다
‘북한구원’, 온몸으로 연기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09.05 09: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탈북학생 출연 연극 <어항을 나온 물고기> 연습 현장

탈북학생이 참여한 최초의 연극으로 화제를 모은 <어항을 나온 물고기>의 연습현장은 생각보다 유쾌했다. 9월 3일 시작되는 공연을 17일 앞둔 지난 22일 저녁. 중앙대 304동 지하연습실은 젊음의 열기로 떠들썩했다.

대사 소리 외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 연습시간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3개월간 매일 12시간씩 연습에 매진했다는 배우들에게 지친 기색은 없었다.

탈북학생들의 행복 찾기

공연 초반에는 북한의 현실을 그대로 읊어야 하는 대사에 눈물을 머금기도 했다는 탈북학생 김필주 씨(한국외국어대) 또한 시종일관 밝은 모습이었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었지만 철저한 경쟁체제인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다는 김 씨는 이번 연극을 통해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김 씨와 함께 혁명대원 역을 맡은 양리인 씨(한국외국어대)는 일곱 살에 극심한 가난으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탈북한 학생이다.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나 형편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학 진학 자체가 불가능한 탓이었다.

어렵게 내려왔지만 한국의 중학교 공부도 만만치 않았다며 그간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극복하기 위해 이번 연극에 지원했다는 양 씨는 “토익공부까지 포기하고 매달린 연극을 통해 내성적인 성격을 버리게 됐다”며 “뻔뻔스러워질 것을 강조한 이 교수님 덕분”이라고 말했다.

예술감독을 맡은 이대영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는 “평소 자신은 탈북학생들을 위로해주지 않는다”며 “만만치 않은 한국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국경을 넘어온 각오로 이를 악물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독한 교수’라고 소개했다.

“연극 연습을 통해 두세 달 간 조직생활을 경험하면 사하라 사막에 떨어트려 놔도 살아남을 의지력이 생길 것 같아 시작했다”며 참여하게 된 계기를 밝힌 그는 “연습을 하는 동안 어린 시절의 힘든 기억을 극복한 아이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행복해지는 것을 보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두 명의 탈북학생을 포함해 12명의 대학생이 배우로 출연하는 이번 연극에는 70여명의 대학생이 스탭으로 돕고 있다. 연극제작을 제안한 탈북청년연맹이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힘겨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탈북학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고 북한사회의 현실을 널리 알리자는 의미에서 제작을 계획했다고 밝혔다.

탈북청년연맹의 제안으로 함께 하게 된 이 교수는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을 각색해 작품을 완성했다. 이 교수는 “북한 체제에 대해 반감을 품고 혁명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각색했다”며 “기존 작품을 북한 현실에 맞게 바꾸는 작업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드라마적인 요소가 강한 희곡을 통해 갈등이 극복되고 북한의 실태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의로운 목숨

<어항을 나온 물고기>의 또 다른 제목은 ‘정명’, 즉 ‘정의로운 목숨’이라는 뜻이다. 다소 강한 어감이라 부제처럼 붙여 놓았지만 작품의 숨은 뜻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다섯 명의 동지가 모여 혁명을 계획한다는 줄거리 속에 인물들의 내면 갈등과 심리적 도화선이 세밀하게 얽혀 있다. 몇 백 원에 몸이 팔리는 여자들과 거리에서 구걸하는 고아들, 숨 막히는 체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북한 정권의 모순을 깨닫게 된 다섯 명의 혁명동지.

테러를 통해 정권을 붕괴할 계획을 꿈꾸는 이들에게 찾아오는 정의에 대한 고민은 처참한 현실만큼이나 심각하다. 폭탄으로 희생될 무고한 생명에 대한 죄의식과 체제의 억압으로 사라져갈 생명들에 대한 갈등이 찾아오면서 사랑과 우정은 엇갈리고 가족 간의 유대도 희생되고 만다.

연습에 열중한 나머지 혈관이 터진 정 교수의 발간 눈이 어머니의 사무치는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극 중 어머니 역을 맡은 정혜승 중앙대 연극학과 교수는 “어머니는 이념과 체제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이 아니라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 똑같다”고 말했다. 이어 “더 먼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도 후원하는데 우리 동포인 북한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며 “후원금을 내는 정도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는데 연극인으로서 도울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며 참여 동기를 밝혔다.

한편 함께 연기하는 젊은 학생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요즘 세대의 아이들이 작품의 깊은 의미를 표현해 내기가 어려웠겠지만 탈북학생들이 생생히 얘기해 주면서 서로 돕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다”고 칭찬했다.

연극은 가장 효과적인 시위

남자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호 역을 맡은 심하윤 씨(중앙대 연극학과)는 이번 역할을 통해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솔직히 말해 연극을 시작하기 전에는 북한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며 “요즘 세상에 설마 굶는 사람이 있겠냐고 생각했는데 굶었다는 사람(탈북학생)이 내 앞에 있으니 그동안 잘못 알았던 정보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에 옆에 있던 김필주 씨는 “처음에 모였을 때는 남한 친구들이 북한 친구들을 신기하게 보거나 북한 문제에 대해 모호하게 알고 있었는데 차츰 북한 실태를 알게 되면서 이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며 “일종의 문화적 통일이 이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양리인씨 또한 “탈북한 지 13년째가 되니 나 또한 북한의 실상에 대해 점점 잊게 됐다”며 “이번 연극은 북한인권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인과 나 스스로를 향한 각성의 외침”이라고 말했다.

사실 심 씨를 포함해 세 명의 학생을 제외하면 연극이라는 장르를 처음 접해보는 아마추어들이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기는 했지만 발성부터 워킹까지 기초부터 다잡아야 했기 때문에 몇 박 며칠 밤을 새며 연습에 몰두하기도 했다.

한여름에 감기 한번 안 걸린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번 무대가 생애 첫 무대라는 손지상 씨(중앙대 심리학과)는 “처음에는 말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연극의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연극은 가장 효과적으로 북한의 실상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표했다.

<어항을 나온 물고기>는 오는 9월 3일부터 2주 동안 서울 명동 삼일로 극장에서 공연된다.(미래한국)

조진명 기자 jadujo@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