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의 탄생과 진화
K-POP의 탄생과 진화
  • 이원우
  • 승인 2012.09.2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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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의 ECG 법칙 E, C, G

K-POP은 어떻게 이렇게 큰 인기를 얻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이지만 아직까지 누구도 속 시원하게 답하지 못한 질문이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도 K-POP의 성공가도는 이어지고 있다. 2011년까지 일본 시장(J-POP)에서의 성공으로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K-POP은 2012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미국과 영국 시장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며 그 지평을 넓혔다. 본 기사는 K-POP이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진화의 양상을 ‘ECG 법칙’으로 진단하면서 실패와 성공, 기회와 위협에 대해 탐구한다.

• K-POP의 명장면 Best 3가 갖는 시사점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대중음악 역사를 논할 때 인상적인 순간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 서태지와 아이들의 출현(1992)이다. 그들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의 색깔을 불가역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 이후로 음악은 ‘귀’로만 듣는 콘텐츠가 아니다. ‘눈’으로도 함께 즐기는 종합예술이 되었다.

두 번째, 비와 보아의 퍼포먼스 혁명(2002~2003)이다. 음악을 눈으로 즐길 때 필연적으로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가창력(라이브 능력)’을 이들은 놓치지 않았다. 비와 보아 이후 무대에서 직접 노래를 하지 않는 가수는 더 이상 한국 대중음악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세 번째, 2012년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싸이 “강남 스타일”의 성공(2012)이다.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미국 빌보드차트 10위권 입성이 국내음원 발매 60일 만에 이뤄진 것은 K-POP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잠재력을 현실로 입증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위의 세 장면이 전부 10년을 주기로 실현됐다는 사실이다. 통상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으로 추산되는 ‘10년’은 K-POP의 성공에서도 언제나 중요한 기점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10년은 도약의 기간이요, 혁신의 시간이다.”

- 공병호, <10년 법칙>

물론 10년을 주기로 단행된 K-POP의 도약과 혁신이 늘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지난 10년 간의 K-POP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시장 ‘소멸’의 공포와 싸워야만 했던 것이 사실이다.

2000년 전후 냅스터와 소리바다로 대표되는 mp3의 등장. 그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음반 구매에 돈을 지불하지 않는 새로운 소비행태를 파생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결정적이었다.

공연수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이나 일본의 상황과는 달리 가수들이 음반 수익에 전적으로 의존했던 한국의 상황에서는 엄청난 시련이었다. 록밴드 ‘넥스트(N.EX.T)’를 이끌었던 신해철이 ‘멸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허나 모두가 ‘끝’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언급하고자 하는 ‘K-POP 진화의 ECG 법칙’ 역시 이와 같은 극단적 위기의 상황에서부터 발현된 것이다.

• K-POP 진화의 ECG 법칙 ‘E’ : Endure

2012년 현재 K-POP을 이끌어가는 3대 기획사로는 YG엔터테인먼트,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가 꼽힌다. 그런데 이 세 기획사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세 회사 모두 그 수장이 연예인 출신(이수만, 박진영, 양현석)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21세기의 K-POP이 ‘음악밖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의 버티기(Endure)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는 점을 그대로 상징한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대중음악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은 일찌감치 손을 털고 시장 밖으로 떠났다. 이를 테면 대기업들이 그랬다. 90년대 후반부터 음반유통에 관심을 보였던 삼성과 LG는 mp3의 등장과 함께 시장에서 종적을 감췄다. 이것은 당시의 대중음악 시장이 그만큼 불모지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대기업들만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시장에 대해서는 스크린쿼터와 같은 반(反)시장적 조치들까지 동원하며 보호와 육성에 앞섰던 정부는 음악시장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총체적 난관 속에서 ‘음악밖엔 모르는 사람들’은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K-POP 역사상 최고의 성공신화를 써내려가고 있는 싸이의 음악인생 역시 ‘버티기’로 점철되어 있다.

싸이의 데뷔는 2001년. 한창 한국 대중음악이 침체를 겪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초 ‘작곡가’가 꿈이었던 싸이는 아무리 해도 자신의 음악이 팔리지 않는 상황을 견디다 못해 직접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운 좋게도 당시의 ‘엽기’ 코드와 맞물리면서 데뷔곡 “새”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싸이의 음악인생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대마초파동과 학력위조의혹, 군대 부실복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 싸이는 자주 공격받았다. 이제 와서는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국민가수’로 대접받고 있는 싸이지만 한때는 온국민의 미움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이는 어떤 상황 앞에서도 ‘음악’과 ‘공연’이라는 두 가지 강점을 포기하지 않았다. 혹은 그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이 ‘버티기’가 오늘날의 막대한 성공을 가능케 했다.

“성공의 비결은 간단하다. 최대한 집적거려라.”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스완>

이와 같은 버티기 코드는 비단 싸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각자 비슷한 질곡을 거치며 나름대로의 버티기를 지속했다. 시장 차원의 정리해고는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이 과정에서 생존한 자들에게는 시련과 불황에 대처하는 내성(耐性)이 생겼다.

진화의 개념을 논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은 ‘진화=진보’로 생각하는 오류다. 그러나 진화는 어떤 하나의 명확한 청사진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수렴하고자 지향하는 능동적인 노력이 아니다. 그보다 진화는 ‘적응’에 훨씬 더 가까운 개념이다.

“진화는 우연과 필연의 혼합이다. 변이의 수준에서는 우연이지만
자연 선택이 작용하는 단계에서는 필연인 것이다.”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주어진 상황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간에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티고 발버둥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변화상이 출현하는 것이다. 그 변화의 이름이 바로 진화이며, K-POP의 진화가 바로 이와 같은 ‘침체에 대한 적응’으로 인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 K-POP 진화의 ECG 법칙 ‘C’ : Copy

레퍼런스(reference)라고 하면 보통은 ‘참고문헌’을 의미한다. 어떤 하나의 저작을 만들 때 원작자가 참고한 자료들의 목록이다. 그런데 K-POP에서도 이 레퍼런스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통상 어떤 아티스트가 새로운 노래를 녹음하기 전에는 기획사의 A&R(Artist & Repertoire) 파트 담당자들이 신곡의 컨셉을 정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유행을 창조해 낼 수 있는 레퍼런스를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현재 인기를 얻고 있거나, 지나간 유행이지만 다시 활용되었을 때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만한 사례가 있다면 가수의 이름과 노래 제목까지 지목해서 작곡가 집단에게 전달한다.

테마를 전해들은 작곡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총동원해서 창작에 몰입하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가장 적합한 노래가 이른바 ‘타이틀곡’으로 낙점된다. 모든 기획사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구조적 표절’이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다. 창작자들이 제각각의 재능을 발휘한 결과가 귀납적으로 취합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연역적인 과정을 거쳐 K-POP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와 같은 Copy의 과정이야말로 K-POP 성공의 커다란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JYP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인 박진영이다. 1994년 가수로 데뷔한 그는 1997년 솔로 여가수 진주를 프로듀스하면서부터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주의 데뷔곡은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의 1979년 히트곡 “I Will Survive”였다.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진 글로리아 게이너의 이미지와 강점을 진주에게 그대로 투영한 시도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god의 데뷔곡 “어머님께”, 원더걸스 최고의 히트곡인 “Tell Me”가 모두 팝 원곡이 있는 형태에서 샘플링되거나 인용된 형태로 재창조되었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 획을 그은 박진영은 끊임없이 미국 흑인음악의 주요 악곡들을 한국시장 나름대로의 시의성을 담아 발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전략은 그에게 커다란 성공을 가져다 줬지만 그 대가로 박진영은 끊임없이 표절 시비에 휘말려야만 했다. 비단 그만이 아니라 빅뱅의 지드래곤, 신사동호랭이 등 히트곡 작곡가들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표절시비에 휘말려 대중들과의 소통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

K-POP의 성공을 ‘거품’으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자주 지적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과도한 카피’의 문제다. 타인의 성공을 그대로 베껴 본인의 것인 양 허장성세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는 물론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K-POP 아티스트와 대중의 소통이 단독거래가 아닌 ‘반복거래’의 양상을 띤다는 사실이다. 단 한 번의 성공을 위해 무리한 카피를 하는 아티스트는 법적/도덕적 잣대에서부터 단죄 받을 수밖에 없다. 참고하되 베끼지 않는 것. 그 미묘한 중간지대의 어디쯤에서부터 K-POP은 다양한 진화의 발판을 다져왔다.

박진영은 수많은 표절 시비에 휘말렸고 그 중에는 심각한 것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K-POP에서 가장 개성이 뚜렷한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가 레퍼런스를 중시하면서도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는 방증이며, 대중들 또한 그 점을 납득하고 있다는 의미다.

표절 시비에 대한 진정한 판정은 법원이 아닌 대중들이 하게 마련이며, 기존에 존재하는 작품을 참고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흉내 내기(Copy) 과정은 K-POP 진화에도 대단히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베끼고 베끼고 베낀다. 그러다 어느 날 작품을 만들어낸다.”

- 파블로 피카소

• K-POP 진화의 ECG 법칙 ‘G’ : Go

우리는 언제부터 한국 대중음악을 K-POP이라고 불렀을까. Korea를 의미하는 K는 한국시장 안에서는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글자다. 다시 말해 K-POP이란 말은 ‘버티기(Endure)’와 ‘흉내 내기(Copy)’를 반복하며 입지를 다져온 한국 대중음악이 나라 밖으로 ‘진출(Go)’하면서부터 활성화된 용어다.

그런데 K-POP의 해외진출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국내에서의 성공을 등에 업고서 자랑스럽게 진행된 형태가 아니라 국내에서의 입지가 좁아져 어쩔 수 없이 감행된 ‘강제진출’이었다는 사실이다. 비즈니스적 의도 없이 ‘한국 대중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해외로 진출한 K-POP 업계 종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와 같은 행동패턴은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김태환 교수의 견해를 보자.

“기업은 왜 경쟁력을 강화하고 시장의 지배자가 되려 하는가? … 궁극적인 답은 아마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의 목적은 재귀적이다. 기업은 생존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마치 생명의 목적과도 같다. 생명의 목적은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종은 번식을 통해 개체의 수를 어떻게든 늘리려고 한다. 그것은 멸종하지 않기 위해서다. 예술가 역시 마찬가지다. 명성을 축적하려는 예술가의 노력도 소멸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 김태환, 『자유주의 전체주의 그리고 예술』 中 <자본주의와 예술>

K-POP에게 해외에서의 명성이 필요했던 이유, K-POP이 해외로 진출(Go)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생존’이 있다. K-POP은 도저히 한국시장 안에서 자생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진출한 곳은 일본시장이었다. 일본음악(J-POP) 시장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위용을 자랑한다. 인터넷 발달로 음반판매가 줄었다는 점은 같지만, 여전히 CD가 1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상대적 호황의 시장이다. 거기에 덧붙여 멜로디를 중시하는 음악적 경향까지 한국과 맞아떨어졌기에 한국음악의 일본진출은 당연한 수순처럼 여겨졌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인 보아와 동방신기는 한국에서의 성적과 무관하게 일본시장의 ‘밑바닥’에서부터 기반을 다졌다. 보아의 경우 한국 출신이라는 것을 상당수 일본인들이 인식하지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본어와 적응력을 보여주며 성공적인 성과를 쌓아올렸다.

2011년은 일본 시장 내에서 카라와 소녀시대의 입지가 확고히 마련되어 K-POP 붐이 일었던 시기였다. 일본에서는 가수로도 활동하는 장근석의 경우 J-POP 가수 최고의 영예인 도쿄돔 공연을 성사시켜 4만 5천석을 매진시켰다. 그 밖에 숱하게 많은 K-POP 가수들이 ‘한국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가지고 일본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해가 바뀌어 2012년의 경우 한-일 양국의 외교가 난맥상으로 접어든 것과 궤를 같이 해 일본 내 K-POP 열풍의 기세는 한 풀 꺾인 상황이다. 하지만 대신 2012년에는 미국과 유럽 시장에서의 반응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12년 싸이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B급 정서를 가진 특이한 아티스트의 예외적 성공’으로 해석하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싸이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가 북미 지역에서의 활동을 이미 오래 전부터 정성스럽게 준비해 왔음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해석은 지나치게 편협한 것이 된다.

지난 9월 29일자 미국 빌보드 Hot100 차트에서 싸이가 11위를 차지했을 때, 압도적인 환호의 분위기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같은 소속사 지드래곤의 새 앨범 <One of A Kind>가 앨범 차트에서 16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YG엔터테인먼트, 나아가 K-POP이 미국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채널’이 이미 확립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강남스타일”의 말춤으로 인기를 얻은 싸이가 미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구축하는 인적‧물적 네트워크는 고스란히 YG엔터테인멘트의 자산이 될 것이다. 이로써 싸이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빅뱅과 2NE1 등이 쾌속 질주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현재까지 관찰된 K-POP의 성공은 앞으로 이어질 ‘더 큰 성공’, 보다 활발한 진출(Go)의 도입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회장은 지난 7월 문화산업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컬처 이코노미(Culture Economy)’ 시대의 개막을 선언하며 “한국이 일본 경제를 5년 내에 앞지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때 멸망의 도상에 있었던 한국 대중음악이 이제는 국가 경제의 한 브랜드로 올라선 것이다. 최근 정부가 싸이를 ‘독도 홍보대사’에 위촉하는 방안을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K-POP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표상하는 한 사례였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K-POP의 탄생과 진화가 갖고 있는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일이다. K-POP은 정부를 포함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저히 자생적 진화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 왔다. 절대적 위기 속에서 버티고(Endure), 성공사례를 흉내 내며(Copy), 생존을 위해 진출(Go)했던 것이다.

생태계의 진화는 아무런 목적 없이 각 개체의 생존의지가 집합된 결과로 일어난다.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이 메시지는 언제나 ‘현재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길 좋아하는 인간의 편향된 시선에 교정의 메시지를 던진다. 절대적인 하나의 청사진을 들이대며 일정한 방향을 강요하길 좋아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속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K-POP의 탄생과 진화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미래한국)

(본 기사는 9월 27일(목) 오후 7시 개최되는 경제진화연구회 2번째 정기파티 “K-POP의 탄생과 진화” 발제를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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