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밥상 토크’가 대한민국 운명을 좌우한다
추석 ‘밥상 토크’가 대한민국 운명을 좌우한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09.25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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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스미스(Mark A. Smith)의 <라이트 토크>(The Right Talk)를 읽고

이제 대선이 8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후보도 일단 결정됐다. 9월 16일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문재인이 승리하고, 9월 20일 안철수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일찌감치 새누리당 후보로 결정돼 기다리고 있던 박근혜와의 3자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물론 이 구도가 끝까지 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다. 최종 결승전을 치르기 이전에 문재인과 안철수 사이에서의 후보 단일화가 이뤄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점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좌클릭, 현실정치로 이해해야

문제는 우리 보수주의 운동 진영이다. 현재 보수주의 진영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번 대선에 대해 냉소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의 계속되는 좌클릭에 대해 실망감을 넘어, 배신감을 맛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시장경제론자들은 박근혜 캠프의 소위 ‘경제 민주화’에 대해 매우 시니컬하게 반응하고 있다. “도대체 좌파논리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며, 선거 불참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아니 심지어 “이렇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보다, 차라리 좌파가 이기고 판을 새로 짜서 다시 시작하는 편이 낫다”는 식의 극언을 내뱉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새누리당의 좌클릭의 1차적 원인은 새누리당의 태생적인 무이념적 기회주의 속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누리당의 성격을 바꾸기는 커녕, 견인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 보수주의 운동 진영의 무능력과 허약함도 또 다른 측면에서의 원인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 보수주의 운동 진영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정부 및 새누리당에 대한 심리적 기대감이 너무 높다는 점에 있다.

사실 새누리당에 대한 실망도 이러한 심리적 기대감에 대한 배신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 조직은 표를 얻기 위한 선거조직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당은 선도적 문제제기 투쟁이나 프레임 형성 투쟁에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본질상 대중추수주의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제기 및 프레임 형성투쟁은 정당 조직이 아닌 사회운동단체의 역할일 수밖에 없는데, 불행하게도 우리 보수주의 진영이 그 역할을 제대로 감행해 낼 역량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짝사랑의 대상자가 다른 이성에게 곁눈질하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홧김에 서방질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소위 ‘경제민주화론’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최선과 차선 간의 선택이 아닌, 최악과 차악 간의 선택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 선거라는 사실이다.

또 대한민국 ‘현실정치’에서의 ‘권력’의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사소해 보이는 차이가 대한민국 운명을 가름할 수 있는 거대한 차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좌우간 권력이 바뀔 경우, 이제 겨우 싹이 트기 시작한 보수주의 운동 진영은 엄청난 시련을 겪을 공산이 매우 크다는 점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이번 대선의 최대 격전지는 ‘추석 밥상’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선거의 기본 축은 지역과 세대이다. 이번 추석 밥상을 통해, 희미해져 있던 수도권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지방 출신자들의 ‘지역정서’가 되살아날 것이며, 반대로 수도권 지역의 담론이 지방으로 확산될 것이다. 또 이른바 ‘세대 간의 공방전’이 벌어질 공산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번 ‘추석 밥상’의 이니셔티브 잡기는 사실상 씨름판에서의 ‘샅바 잡기’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안철수도 추석 이전에 출마 선언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추석 밥상을 장악할 것인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메시지 문제가 아니라 메신저의 문제이다. 아무리 메시지가 올바르고 훌륭해도 메신저가 불신당하는 이상, 그 메시지가 먹힐 리가 없다. 메시지가 옳기 때문에 메신저를 신뢰하는 경우보다는 메신저를 믿기 때문에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즉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선한 메신저’(good messenger)가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추석 보수진영의 선거 운동

둘째, 메시지 전달 대상자의 ‘자기 이익’(self-interest) 혹은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으로부터 메시지를 끌어내야 한다. 메시지 전달 대상자의 관심 밖의 이야기를 떠들어야 공감대가 형성될 리가 만무하다. 메시지 전달 대상자는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혹은 ‘꼰대의 잔소리’ 쯤으로 치부해 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셋째, 따라서 추상적 개념이나 이념에 대한 공방(攻防)보다는 구체적 현실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조직해 내야 한다. ‘자유’와 ‘반공’과 같은 이념은 이를 체화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공허하게 들린다. 이러한 개념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개념을 구체적 문제와 연결시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 ‘빨갱이’란 말을 남발할 경우, 이 단어에 대한 면역력만 높여줄 수 있다.

물론 일반선거와 달리, 대선에서는 ‘분노’와 ‘공포’ 이외에 ‘희망’이 주요 무기로 대두된다는 특징이 있다. 마지막으로 선거는 ‘구도 싸움’이라는 점이다. 즉 자기 진영이 누구이고, 상대방 진영이 누구인지를 자신의 구도대로 규정하고, 이러한 구도 속에서 대중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싸움이다. 이러한 ‘구도 잡기’가 선거의 승패를 좌우해 온 것이 역대 선거사의 결과이다.

대중 선거와 경제 프레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마크 스미스의 <라이트 토크> (The Right Talk)를 읽어 보았다. 여기서 ‘라이트’란 ‘우익’이란 의미와 ‘올바른’이란 의미를 중의법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저자 스미스는 ‘레토릭’(rhetoric)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레토릭이란 우리가 일상용어로 사용할 때 주로 의미하는 ‘미사여구’란 뜻이 아니고, 고전적 의미에서의 ‘수사학’(修辭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레토릭’이 단순히 ‘말하는 기술’ 혹은 ‘웅변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레토릭’은 ‘관심’ 혹은 ‘이익’(interest)과 ‘이념’(ideas)을 연결시켜 주는 교량이다. 즉 적절한 ‘레토릭’과 적합한 ‘프레임 형성’ 없는 주장은 대중적 설득력이나 공감대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저자는 대중의 투표로 ‘권력’이 결정되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역시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 프레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과세 문제를 거론하더라도 ‘불공평’의 시각이 아닌, ‘경제적 비효율성’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며, 경제규제 문제도 ‘자유’보다는 ‘일자리 감소’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어떻게 경제 프레임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고 장악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저자는 ‘경제 프레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즉 광범위한 대중 앞에서의 무차별 폭격방식으로서의 ‘경제 프레임’의 최고 우선성을 역설하면서도, ‘표적 그룹들’(targeted groups)에 대한 다양한 이슈 프레임을 통한 정밀포격의 중요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러한 ‘표적 그룹들’에 대한 공략은 ‘레이더 망’ 아래에서 이뤄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산토끼 대 집토끼 논쟁’에서 잘 생각해 봐야할 대목인 것 같다.

문뜩 레닌의 한 문구가 떠올랐다. “ ‘살인자다!’라고 소리치지 마라. 단지 그의 피 묻은 손을 보여줘라.” (미래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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