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를 ‘너그러운 이웃’에 맡길 것인가
안보를 ‘너그러운 이웃’에 맡길 것인가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10.09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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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국가경영>(Statecraft)을 읽고
 

2002년 2월 런던의 한 한국음식점. 아프간에서 함께 고생했던 외국기자들과 함께 불고기와 소주를 즐기고 있었다. 주된 화제는 아프간에서의 무용담이었다. 특히 힌두쿠시 산맥을 넘을 때 프랑스 방송기자단 차량이 전복돼 구조를 요청했던 이야기가 주된 안주였다. 타지키스탄을 통해 아프간으로 들어간 우리 팀은 2001년 11월 북부동맹군과 함께 수도 카불을 향해 계속 남진하고 있었다. 해발 3848m의 카박 패스(Khawak Pass)를 넘어가려는데 이미 눈이 쌓였을 뿐만 아니라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에 필자는 인근 마을에서 밤을 보낸 뒤 다음날 넘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행했던 프랑스 방송기자단은 하루빨리 카불에 들어가야 한다면서 우리를 뒤에 남겨둔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 기자단을 떠나보낸 뒤 우리 팀은 산간마을 민가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그때 체코 여기자가 반발했다. 하루가 급한데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없다며 프랑스 기자단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겁쟁이들”라는 표현마저 내뱉었다.

당나귀를 잡았던 사연

그러나 필자는 날이 밝기 전에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뒤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필자를 비난하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그러나 그냥 무시하고 자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여기자가 필자를 흔들어 깨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프랑스 기자 몇 명이 와서 떠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 팀의 독일 기자가 통역해 주었다. “프랑스 기자단이 조난당했으며 따라서 구조하려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구조에 나섰다. 부상자는 있었지만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급히 오느라고 식량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타고 왔던 당나귀 한 마리를 잡아야만 했다.

이야기가 ‘즉석 당나귀 불고기 요리’로 옮겨갈 쯤에 화제를 돌렸다. “오늘 뮤지컬은 어땠어?” 필자는 이날 때마침 런던 웨스트엔드(Westend)의 아폴로 해머스미스 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던 뮤지컬 ‘명성황후’ 표를 입수(?)하는 데 성공, 아프간에서 함께 했던 몇몇 외신기자들을 초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공연 후 한국 식당으로 함께 왔던 것이다.

덕담인지 진심인지, 이구동성으로 재미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뮤지컬 이야기를 별로 화제로 삼으려 들지 않았다. 정말 재미 있었느냐는 의미에서 “really?”라고 물을 때, “really?”는 상황에 따라서 “공갈치지 마!”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어디에선가 들은 블랙유머(?)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일본인들 그것도 깡패들이 너희 나라 궁궐을 습격해서 황후를 살해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너희 나라 황실 경호대는 뭐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습격에 가담했던 일본 깡패들은 어떻게 됐어?”
“너희 황후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으려 한 모양인데 만약 그렇게 됐더라면 혹시 러시아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까?”
“황후가 살해된 이후에 일본과 전쟁해서 패하는 바람에 너희 나라가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이지?”
“황후(empress)라고 했는데 혹시 왕비(queen)가 맞는 것 아냐? 당시 너희 나라 병력은 얼마나 됐어?” 등등.

오랜 해외생활에서 외국인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정말 엉뚱한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우리끼리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러한 생각이 들더라도 애국심을 의심받아야 하기 때문에 감히 할 수 없는 질문들을 외국인들로부터 받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럴 때 기분이 나쁠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 제기 덕분에 시야를 넓히기도 한다. 다른 측면에서 우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당돌하고 날카로웠던 질문들

필자는 한국을 자랑하기 위해 어렵게 표를 구해 이들을 초청하고 한국식당에서 식사까지 접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인끼리라면 제기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문제들을 제기한 것이었다.

‘황후’라는 어마어마한 명칭과 어울리지 않는 황실 경호대의 능력, 그리고 당시 극동정세를 “흉악한 일본인의 야욕”만으로 설명하려는 한국인들의 순진함(?)을 ‘현실정치’(Realpolitik) 입장에서 마구 난도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당시 우리 조선 군대는 뭐하고 있었을까?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경제 흐름을 살펴보면, 구한말 상황이 재현되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세계경제 흐름이 엉망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어렵다고 하나 사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그나마 잘 버티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경제이다. 그런데 어렵다고 한탄만 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내 세계경제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그저 있는 것을 어떻게 나눠먹을 것인지 만을 궁리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은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나눠주기 공약’에 급급한데 자기 것을 나눠주는 것도 아니고 국민 것을 나눠준다면서 선심 쓰는 것처럼 행세하는 꼬락서니들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둘째,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과 중국과의 힘의 균형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국이 ‘근육’을 자랑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에 일본이 맞서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중국과 일본 모두를 동시에 적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선후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다.

국가의 최대 역할은?

셋째,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수렴청정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의 위독설이 나오고 있다. 이미 작년 말부터 많은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김경희의 건강이 좋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그녀가 죽으면서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말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 문제 역시 근거 없는 낙관론에 입각해서 ‘북한 퍼주기 공약’ 경쟁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국제정세에 어둡고, 국방과 경제문제에 무능하며, 야릇한 명분론으로 민심을 현혹하고 있던 조선왕조 말기 정치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추석기간 연휴에 대처의 <국가경영>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의 부제 ‘변화하는 세계를 위한 전략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영국의 국가경영, 특히 외교 안보 정책에 관한 책이다. 대처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국제안보의 유지’라고 역설하면서 “외교 안보 정책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힘의 사용’(the use of power)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힘의 사용’,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외교’하면 연미복을 입은 파티를 연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센카쿠 열도에서 중국과 일본이 충돌한다면, 아니 서해에서 중국과 미국 함대가 맞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대처는 안보문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니 북한에 정변이 일어난다면? 좌우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기는 커녕, 문제제기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있는 꼴이라니?!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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