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한류' 만든 반상의 전설
바둑 '한류' 만든 반상의 전설
  • 김주년 기자
  • 승인 2012.10.2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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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50주년 맞은 바둑 황제 조훈현 9단

 

2012년 10월 14일은 한국 바둑의 상징적 존재인 조훈현 9단이 입단한 지 50주년 되는 날이다. 조 9단은 만 9세였던 1962년 10월 14일 한국기원의 입단대회를 통과하며 프로가 됐다. 이는 세계 최연소 입단 나이로,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듬해인 1963년 10월 조 9단은 당시 바둑 선진국이었던 일본으로 건너가 고(故) 세고에 겐사쿠 9단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한국 바둑계를 무시하던 일본은 조 9단의 프로 자격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조 9단은 1966년 일본기원 입단대회까지 통과해 초단을 취득한 뒤 10년만인 1972년에 군대 문제로 귀국, 한국에서의 바둑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조훈현의 천재성을 알아본 일본 바둑계에서는 그의 귀국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했다.

한국이 좁았던 천재, 결국 세계 정상에 서다

조 9단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바둑계에서 조훈현 9단의 아성을 위협한 호적수는 서봉수 9단이 유일했다. 그럼에도 조 9단은 서 9단까지 연일 격파하며 국내 프로기전 전관왕을 세 번이나 달성했다. 최정상에 올랐음에도 목표 상실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에 대해 라이벌이었던 서봉수 9단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훈현은 야망의 칼을 갈고 있었다. 적수가 없는 이곳 한국에서 그 친구는 스스로와 싸우고 있었다. 그는 집중하고 몰입하여 마음의 끈을 결코 풀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일본과 중국은 한국 바둑의 수준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양국은 국가대항전인 ‘중-일 슈퍼리그’를 벌이며 세를 과시하면서도 한국은 끼워주려 조차 하지 않았다.

결국 한-중-일 3국의 바둑 최고수들이 총출동한 세계대회가 1988년에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대만 재벌 잉창치(應昌期) 씨는 당시 최대 규모의 상금인 40만 달러가 걸린 바둑대회를 개최했다. 매년 열리는 타 대회들과 달리 4년마다 열리기로 예정된 대회였기에 가히 ‘바둑올림픽’이라고 불릴 만했다.

그런데 주최 측은 한국 바둑의 수준을 깡그리 무시한 나머지, 조훈현 9단 1명에게만 초대장을 보냈다. 한국기원은 항의했지만 ‘싫으면 참가하지 말라’는 차가운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조 9단의 어깨엔 대한민국 바둑의 강력함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까지 더해졌다. 그럼에도 조 9단은 떨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16강에서 신예 왕밍완 9단을 격파한 조 9단은 8강에서 당시 일본 최강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초반 포석부터 일방적으로 몰아붙인 끝에 완승을 거둔다.

이어 그는 4강에서 대만계 일본기사로서 ‘이중 허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실력을 자랑했던 린하이펑 9단을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녜웨이핑 9단과 만났다. 홍위병 출신의 녜웨이핑 9단은 당시 ‘철의 수문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던 중국 최강자였으며 4강전에서는 조훈현의 평생 스승인 후지사와 9단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고 결승에 올라왔다.

그러나 1989년 4월부터 시작된 결승전은 순탄치 않았다. 중국인 잉창치 씨가 만든 대회답게, 주최 측은 결승 5경기를 모두 중국에서 열기로 하는 등 노골적인 횡포를 부렸다. 결국 한국 측의 항의로 1-2-3국은 중국에서 두고 4-5국은 싱가포르에서 두는 것으로 결정됐다.

1989년 4월 25일 열린 결승 제1국에서 완승을 거둔 조 9단은 2국과 3국을 연달아 내주며 1승 2패로 벼랑에 몰린다. 그러나 조 9단은 그해 9월 2일 싱가포르 웨스턴스탠포드 호텔에서 열린 4국에서 1집차 역전승을 거두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어 운명의 9월 5일 현장에서 대회를 취재했던 박치문 바둑전문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한 판에 두 사람의 일생이 걸려 있었다. 세계 바둑계의 판도를 일시에 바꿔 놓고 눈 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줄 중대한 계기가 숨어 있었다...(중략)... 두 개의 강인한 정신이 교차했다. 이것은 바둑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애초부터 고통스러운 고문 속에서 누가 먼저 비명을 지를 것인가의 승부였다. 

부동심의 철리를 터득한 듯 묵직하고 두텁게 두어가던 녜웨이핑 9단이 중반에 이르러 갑자기 내닫기 시작했다. 일종의 자폭이었고 종말이었다. 조 9단은 오랜 세월 홀로 연마한 정신력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빛나는 승리였다.”

“내 몫은 했다. 기쁜 일이다”

1989년 9월 8일자 <세계일보>에 따르면 잉창치배 시상식을 마치고 우승컵을 들고 호텔방으로 돌아온 조 9단은 “내 몫은 했다. 그건 참 기쁜 일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 9단의 우승으로 인해 세계 바둑계는 한국을 다시 보게 됐고, 한국 바둑이 세계 최강으로 올라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4년마다 열린 잉창치배 대회의 우승자는 1회 조훈현 이후 2회 서봉수, 3회 유창혁, 4회 이창호, 6회 최철한 등으로 이어졌다. 한국 바둑의 최강자들이 연달아 세계를 제패한 것이다.

조 9단이 한국 바둑계에 남긴 ‘업적’도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후지쓰배, 동양증권배, 삼성화재배 등 세계대회를 무려 11차례나 우승하며 세계 최강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했다. 특히 입단 40년이 된 2002년에 50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삼성화재배 대회에서 중국의 창하오 9단을 꺾고 우승한 것은 또 한번의 드라마였다.

이창호라는 또 한 명의 거목을 키워낸 것도 조 9단의 업적이다. 1984년 조 9단의 내제자로 입문한 이창호 9단은 실력이 일취월장하며 결국 조훈현 9단에게도 승리, 명실공히 세계 최강자가 됐다.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청출어람’이 실현된 것이다. 이 9단은 세계대회에서 총 24회나 우승하며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조 9단은 시니어 리그에서 주로 활동하며 통산 2000승과 최고령 타이틀 획득을 위해 아직도 열정을 쏟고 있다. 대한민국을 바둑 최강국으로 만든 바둑황제는 이제 ‘전설’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미래한국)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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