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괄수가제로 ‘진료실의 바보’ 될 것인가
포괄수가제로 ‘진료실의 바보’ 될 것인가
  • 이원우
  • 승인 2012.10.2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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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을 ‘인간’이 아닌 ‘의사’로만 바라봐선 안 돼
 

자유주의의 영원한 대전제는 ‘누구의 편도 되지 않는 것’이다. 잠시 존 롤즈(John Ralws) 선생을 모셔오자. <정의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주장에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지의 베일(a veil of ignorance)’은 재미있는 개념이다.

원초적 위치(original position)에 선 우리는 천막 뒤의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한국 사람인지 미국 사람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이익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가장 공평하고 정의로운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다. 이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면서 사회적 논점을 바라보는 기초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흔히 공명정대한 시각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넌지시 뒷얘기를 전해들은 면접관처럼 사람을 봐 가면서 다르게 행동한다.

이 과정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것이 ‘소비자 중심주의’라 명명할 수 있는 편향적 태도다. 즉, 다수의 소비자가 이로운 방향으로 제도를 실행하는 것이 어찌됐든 좋은 방향일 것이라는 견해다. 이 말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문제의 논점을 소비자 중심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그 나름의 편향성이 존재한다. 포퓰리즘에 물든 민주주의가 그러하듯 특정 소수(공급자)의 자유를 빼앗기 때문이다.

“EU와 FTA를 했는데 다리미 값은 왜 안 내려가느냐”거나 “가격이 비싸니 상품의 제조원가를 공개하라”는 등의 주장은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공급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반(反)자유적 시도다.

포괄수가제의 정치적 함의

지난 7월부터 도입된 포괄수가제는 언뜻 소비자를 위한 합리적 대안처럼 여겨진다. 병의 종류별로 정해진 치료비를 지급한다는 발상에는 언뜻 흠 잡을 구석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제도의 문구(文句)만을 놓고 본다면 사회주의 역시 지상낙원을 운운했던 바, 포괄수가제의 실질적인 측면들을 고려하면 이 제도의 민낯이 드러난다.

포괄수가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의사들을 ‘인간’이 아닌 ‘의사’로만 바라본다는 점이다. 밤낮으로 환자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더 좋은 치료법을 연구하는 백의천사의 이미지 속에 한 가정을 이끌어 가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지난함은 없다.

포괄수가제는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의사들의 이윤동기를 무시하고 있다. 정해진 치료를 정해진 가격에만 수행해야 하고 환자 쪽에서 추가적인 부담을 하는 것조차 불법인 포괄수가제 안에서 의사는 그저 히포크라테스이기를 강요당한 박제는 아닌가? 이럴 거라면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본래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아무리 정부(국민건강보험공단)가 의사들에게 백의의 천사이길 강요한다 해도 행동을 규제당한 그들의 마음속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불만은 어쩔 수가 없다.

단언컨대 포괄수가제의 확산은 성형외과‧피부과로 편중된 의사들의 전공 편식을 심화시킬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잘 나가는’ 대열에 끼지 못한 의사들의 자괴감은 또 어쩔 것인가.

그들이 정부의 지침대로 기계적인 진료를 이어가는 동안 특별히 환자를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제도는 징벌이 될 수 없다

그간의 의사들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무시 못 할 가격의 CT 촬영을 남발하면서도 늘 상전처럼 행동했던 일부 의사들을 한 번쯤 미워해 보지 않은 국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이 제도에까지 전이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제도는 행동을 바꾸지만, 시작부터 행동을 바꾸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된 제도는 마음을 상하게 할 뿐이다.

50조원의 적자가 예약(2030년)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만한 경영을 해 온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과연 의사들에게 직업윤리 운운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정부와 의사가 첨예한 갈등을 겪는 중에 환자들은 눈칫밥이나 먹어야 한다면 애초에 의도했던 ‘환자들을 위한다’는 명분 역시 순식간에 증발이다.

정부의 규제가 갖는 효과의 시차를 물줄기의 온도변화로 비유했던 밀튼 프리드먼의 ‘샤워실 바보’는 포괄수가제와 함께 ‘진료실의 바보’로 부활할 것이다. 아무 것도 나아지는 것은 없는 채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만 늘어나는 셈이다.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고서 가장 바람직한 그림을 그려 보자. 영감을 주는 것은 이미 가격이 자유화된 피부 관리, 라식 수술, 성형수술 진료 등이다.

명절마다 ‘고객’들에게 문자를 넣어주고 안락한 진료실에 파격할인 이벤트까지 동원하며 환자 유치에 열심인 그들의 고군분투가 내과‧외과‧산부인과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필요한 것은 포괄수가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제도가 아니라 의사들의 의료 활동, 가격책정, 영리 추구의 메커니즘을 자율경쟁의 틀 안으로 포섭시키는 자유주의적 접근이다. 어차피 현 상태의 의료행정이 지속 불가능하다면 의사들의 이윤동기를 인정한 뒤 시장원리(가격)로 환자들과 의사소통 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실패하는 이유는 ‘좋은 것’을 강조하는 재미에 푹 빠져 인간의 진면목을 놓치기 때문이다. 의사건 환자건 인간은 누구나 불편한 것을 싫어하고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존재다.

현재까지의 의료제도가 문제없어 보였던 이유는 진짜 문제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의사들이 본인들의 불만을 ‘자체 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다.

변곡점에 선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최대한 상호 간의 자유로움이 지켜지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의사니까 참으라”는 식의 태도는 자유주의 국가가 취할 선택지가 아니다.

지금은 의료계의 수요와 공급에 자유의 공기를 불어넣을 때다. 그것이야말로 누구의 입장에도 편향되지 않고서 최선의 만족을 도모하는 대안이 될 것이다. (미래한국)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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