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아편이 아니다
종교는 아편이 아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11.0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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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 편집위원

철학은 이성의 외침을 자처하지만 종교는 감성적 언어와 신비적 외양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성의 시대가 열린 근대 이래로 나름 이성적 인간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언제나 ‘신자’보다는 ‘철학자’이고 싶어 했다. 한때 신학은 철학을 시녀로 거느렸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녀에게 거꾸로 검증을 받아야만 한다. 종교와 철학은 여하히 구분되고 자리의 아래 위도 바뀐 시대, 이것이 오늘의 시대다.

이런 시대에 과연 어떤 ‘먹물’이 감히 종교를 변호하러 나설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부터 오늘날까지도 먹물다움의 증명으로 여겨져 온 것은 이른바 ‘종교의 허구’ 폭로에 한 줄, 한 마디를 보태는 것이었다. 극단적 언설이 드물지 않게 이어졌다. 그런데 과연 그게 옳은가?

아편 혹은 바이러스, 뭐라고 욕을 하든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종교가 아편이라면 인류 역사는 아편중독의 역사다. 종교는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다.

종교가 아편이라면 아편은 항상 인간과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고 만다. 항상 동반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더 이상 나쁜 것이라고 할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아편은 좋은 것도 아니고 인간의 불가피한 동반자도 아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는 종교는 바이러스라고 일갈했다. 종교가 바이러스든 박테리아든 도킨스의 언설은 역설적으로 종교의 진실을 드러낸다.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바이러스와 떨어져 살지 못한다. 그것이 때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해도 우리는 그 존재를 불가피한 동반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고 생태계의 섭리다. 종교도 그러하다. 경건한 신자든 무신론자든 인간은 어쨌든 종교로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즉 종교는 아편이 아니다. 그것은 마약이 아니라 영혼의 배고픔과 갈증에 대한 응답의 일종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살지 못한다. 정신도 때로는 허기를 느끼고 갈증을 느낀다. 육체가 그렇듯 우리의 영혼도 일용할 양식과 갈증을 적실 물을 갈구한다.

이성적 창백함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떻든 종교를 철학의 아래에 두고 싶어 하겠다. 하지만 아래 위가 무슨 상관이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 아무렴 어떤가?

BC 800년에서 BC 200년 사이, 동서 문명권 도처에서 한 유형의 인간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차례로 등장했다. 바로 조로아스터,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 등의 인물이다.

이들은 나름의 언어와 논리로 말하고(說) 가르쳤으니(敎) 즉 설교자(說敎者)다. 각 문명권은 이들의 등장과 함께 거의 동시적으로 정신문명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야스퍼스는 이를 두고 축의 시대(Axial Age)라 했다.

축의 시대, 설교자의 등장

인간이 그러하듯 문명에도 성장통이 있다. 축의 시대 설교자들의 등장은 문명의 성장이 가져온 격동의 정신적 파장이었다. 인간이든 문명이든, 격동은 영혼의 갈증을 낳고 목마른 마음은 안식의 샘을 구하게 된다.

이때 정신의 샘물을 자처하며 설교자들이 등장한다. 신성하게 혹은 세속적인 모습으로! 하지만 신성한 사제든 현실세계의 처방을 자처하는 철학자든, 그들은 시대의 위기에 대한 응답자요 새로운 비전의 선포자라는 점에선 동일했다.

설교자들은 근본에서 전사와 상인의 반대편에서 등장하고 자리 잡는다. 하지만 세속의 지배자들도 결국 이들 설교자에게서 자신의 무기를 발견하기 마련이다. 왕과 전사들은 이미 해져 버린 낡은 약속을 대신하여 새로운 말씀의 망토를 걸침으로써 위엄을 되살린다.

상인들도 새로운 말씀에 따른 규칙으로 자신의 욕망을 위한 활동에 신뢰의 포장을 씌운다. 위기에 처한 세속의 정치는 이렇게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설교자의 말씀에서 이데올로기를 구해 다시 안정과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세계를 바꾸는 존재로 두드러져 보이는 유형은 일단 전사(戰士)다. 전사는 어제의 경계를 칼로 끊고 내일의 경계를 새로 구축해 세계의 지도를 바꾼다. 하지만 때로는 설교자가 전사 이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다.

설교자는 칼이 아니라 말을 무기로 하는데, 그 말은 한번 반향을 얻기 시작하면 가장 완강한 경계조차 뛰어 넘어 세계를 내용에서부터 바꿔 버린다.

2천년 전 로마 제국의 동쪽 변방에서 한 설교자가 등장했다. 그는 그 변방 유대 땅에서도 또 변방인 갈릴리 출신으로 이름을 예수라 했다. 당시 ‘수도’ 예루살렘의 양식 있는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방’을 어느 정도는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예수는 그 갈릴리에서도 작은 마을인 나사렛 사람으로 아람어를 사용했고 원래 직업은 목수였다. 그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랍비 즉 선생이라 불리기 시작했지만 예루살렘 기준으로는 좀 시시한 존재였다.

이 시골 랍비는 ‘공생애’를 시작한 지 3년 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했다. 그의 나이 33세 때였다. 출신은 미미했고 삶도 활동도 짧았다. ‘예수 사건’은 예루살렘의 입장에선 작지 않은 소동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제국의 수도 로마의 기준으로는 지방적 사건으로 끝나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우선 예루살렘을 들끓게 하더니 처형 이후에 반향이 오히려 더 커져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제국의 심장부까지 퍼지고 몇 세기 뒤에는 제국 자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그가 등장한 지 2천 년, 그를 신앙의 대상으로 한 기독교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가 돼 있다.

세계를 바꾼 설교자 예수

역사무대에는 다양한 설교자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예수만큼 삶과 죽음이 극적이고 영향력이 압도적인 경우는 드물다. 그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참으로 긴 족적을 남겼고, 그가 못 박혔던 가장 모욕스런 죽음의 형틀은 최고의 신성한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신성한’ 십자가 위의 구세주는 마침내 한 세계 제국을 품에 넣고 문명 자체를 재구축했으며 그렇게 재구축된 문명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지중해 세계 고전문명을 상속했던 로마제국은 예수라는 존재와 조우하면서 기독교 제국이라는 새로운 문명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 문명은 로마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며 수많은 왕국의 명멸을 넘어 서구문명 전체를 관통해왔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서구 역사에선 지울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다. 그는 고전 로마 이후 서구문명의 심장이며 적어도 계몽주의 이전까지는 머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존재감의 무게에 비해 정작 그 역사적 실체 자체는 장막에 가려진 듯 모호하다.

신약의 4복음서를 제외하고 예수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당대의 역사서는 사실상 없다. 1세기 무렵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저서에 나오는 예수 얘기를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엄밀한 사료비평에 따르면 그 대목은 후대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당시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기독교와 그 교인들에 대해선 기록하고 있지만 예수 자체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예수는 신화와 역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다.

그는 근본적으로는 신화의 장막 뒤에서 빛을 뿜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신화’라는 단어를 허구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 현상’ 혹은 ‘예수 운동’은 분명한 역사적 실재였다. 더욱이 ‘신화’와 ‘역사’는 서로 대립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햇빛을 받으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영글면 신화가 된다.

‘예수 이야기’가 그렇다. 예수는 용서와 사랑 희생 등 인간 미덕의 모든 고귀함을 상징한다. 원래 인간의 것일 그 미덕이 기적의 옷을 입고 신이 되고, 신화는 그렇게 현실 역사에 자리를 만든다. 그래서 예수 이야기는 ‘신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역사’다.

사실 인간 미덕의 최고 정점은 어떤 점에선 신의 자리와 같다. 대부분의 인간은 결코 미덕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할 그 정점에서 신의 광휘를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합리론자의 관점에선 미덕과 기적은 분리될 수 있고 또 분리돼야 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는 합리와 비합리, 이성과 감성이 교직된 세계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겐 그 구분이 오히려 낯설다.

인간에 대한 광신이 더 위험하다

종교를 비웃고 기독교를 욕하는 게 ‘비판적 지식인’의 기본 자격처럼 여겨지는 풍조가 있다. 하지만 정말 더 위험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반신앙의 신앙’이다. 무신론과 반종교를 자처한 공산주의는 그 자리에 결국 공산‘당’이라는 ‘신 없는 교회’를 세웠다.

그런데 그 ‘신 없는 교회’가 인간을 얼마나 더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켰는가?

어떤 종교를 믿든 광신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게 종교에 대한 속단이다. 종교를 믿든 안 믿든 종교는 손쉬운 속단으로 재단할 만큼 그렇게 얇은 게 아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위험한 최악의 위험은 인간에 대한 광신이다. 시공간적으로 멀리 갈 것 없다. 휴전선 이북을 보면 된다.

그런데 그 남쪽은 지금 어떤가? 광신은 과신과 동그라미 하나 차이다. 특정 인간에 대한 멍청한 맹신! 바보가 되는 것은 순간이고 대가는 크다. 정신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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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vorkl 2014-05-17 06:18:54
Thanks for consisting of the stunning pictures-- so vulnerable to a feeling of ref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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