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자유다
기독교는 자유다
  • 이원우
  • 승인 2012.11.0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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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의 자유주의
 

어린 시절 교회에 가는 것은 1주일의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였다. TV에선 <톰과 제리>가 폭소를 유발하며 뛰어다니고 있건만, 어째서 황금 같은 일요일에 교회처럼 따분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이나 실컷 자고 싶었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접한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위와 같은 심리를 느껴봤을 것이다. 그들이 택하는 신앙의 경로 또한 어느 정도 비슷하다.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교회와 멀어지고, 교회에서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줬던 나쁜 말들을 내뱉어보거나 읽지 않는 게 좋겠다고 권고 받았던 책들을 몰래 읽으며 그 무렵의 반항심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모태신앙’으로 건국

흥미로운 점은 ‘모태신자의 반항’이라는 테마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거시적인 현주소를 정확하게 표상한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부정하고 싶겠지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람으로 따지면 ‘모태신앙’으로 건국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유입된 근대적 문명(학교, 병원 등) 자체가 기독교와 깊은 연관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그때만 해도 기독교는 자유와 혁신과 독립의 아이콘이었다.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개원된 제원의회 제1차 회의는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 의원의 기도와 함께 시작됐다. 기도를 제안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은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 자랑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세계무대에서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던 대한민국의 건국 무렵, 기독교가 수행했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후의 한국 역사는 눈부신 발전과 성장의 스토리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와 태국을 부러워하던 대한민국은 어느덧 그들보다 훨씬 나은 여건 속에서 배고픔을 잊은 채 살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역시 급속한 경제성장과 궤를 맞춰서 나날이 교세를 확장해 갔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붉은 십자가.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모태신앙과 함께 힘차게 건국된 대한민국의 현재는, 마치 교회를 멀리하면서 해방감을 느꼈던 여느 모태신자들의 청소년기처럼 기독교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절망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희망의 메시지로 출발했던 기독교는 21세기에 이르러 ‘기득권’으로 인식되며 깎아내려져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 앞에서 똑똑하게 보이고 싶은가? “신은 없다”고 크게 말하라. 독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싶은가? 기독교 대신 ‘개독교’라고 외치라. 한때 자랑스러운 한국 역사의 지표(index)였던 기독교는 이렇게 어느덧 ‘더러운 이름’이 돼버리고 말았다.

한국 기독교의 더욱 커다란 비극은 일부 교회들이 기독교의 명예를 더럽히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의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자들도 저지르지 않는 성범죄와 사기와 부정부패에 얼룩진 현실은 숭고했던 초기 기독교의 명예를 단번에 더럽히고 만다. 강압적인 전도와 불신자를 ‘불쌍하게’ 여기는 태도 또한 기독교의 오명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굳건히 자리를 잡아줘야 할 믿음의 리더들이 흔들릴 때 생기는 심각한 폐해 중 하나는 기독교가 끊임없이 세속화-기복신앙화된다는 사실이다. “시험 잘 보도록 해 주세요”, “연봉 높은 직장 잡도록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는 기독교의 정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다만 기독교의 정신을 왜곡해 전파시킴으로써 위기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최근 “소개팅 할래?”라는 문구와 함께 여신도 18명의 사진을 전도 자료에 게재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모 교회의 사례를 보고 있으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구한말 고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조선으로 건너와 목숨까지 내놓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풍경을 봤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예배가 ‘축제’가 될 때

모태신자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의 핵심은 예배를 ‘의무’로 느끼는 데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겉으로는 멀쩡하게 교회를 잘 다니는 신자들의 상당수가 속으로는 교회 가는 걸 귀찮고 따분하게 느낀다. 초기 기독교의 생생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이 종교 안에 ‘자유’의 비중이 턱없이 줄어든 것이다.

신자들의 상황이 이러한데 교세 확장이 다 무엇이고 진정한 의미의 전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싫다는 사람을 애써 불러와 교회에 앉혀놔도 그저 따분한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이라면 말이다.

진정한 전도는 기독교 스스로가 깨끗하고 멋진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를 포함해 이미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분발이 요청된다.

예배를 ‘억지로 하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스스로의 불완전함에 대해 상념하고, 어둡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관심을 가지며, 미래에 대한 에너지를 충전하는 ‘축제’의 매개체로 변환시켜야 하는 것이다.

예배가 ‘즐거운 것’으로 거듭나는 순간 신앙은 자랑이 되고 자신의 삶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전도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교회가 멋진 곳이 되고 예배가 즐거워지면 사람은 자연스레 넘치게 되는 것이다.

통상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종교를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을 많이 듣는다.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과 현실의 희소성에 대해 끊임없이 겸허한 자세를 요구하는 자유주의는 기독교 정신과 훌륭하게 합치되며 더 나은 삶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도록 영감을 제공한다. 초기의 기독교가 그랬듯이 이 종교의 밑바탕에는 자유에 대한 지향성이 깔려 있다.

기독교의 위기는 곧 자유의 위기인 바, 지금은 모든 멸시와 편견을 딛고서 ‘비뚤어진 모태신앙’ 대한민국에 자유의 입김을 불어넣을 시간이다. 전세역전의 본진은 다름 아닌 교회다. 예배가 축제가 될 때, 기독교는 자유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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