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을 이해하는 세 글자 - 家 · 結 · 濁
시진핑을 이해하는 세 글자 - 家 · 結 · 濁
  • 이원우
  • 승인 2012.11.23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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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배경[家], 결속을 중시하는 행보[結],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흐릿한 캐릭터[濁]
 

지난 11월 14일 중국 공산당 제18차 당 대회가 폐막했다. 이번 당 대회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은 역시 ‘새로운 중국’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 시진핑(習近平)이었다.

2007년 제17차 당 대회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으며 차기주석 감으로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 라인’의 핵심 후계자이자 공청단의 리더였던 리커창(李克强)이야말로 제5세대 지도자의 대표가 될 것이라는 게 일관된 예측이었다. 시진핑은 기껏해야 리커창과 함께 상무위원에 진입하는 배경적 존재로서만 거론될 따름이었다.

그러나 2007년 당 대회가 끝난 뒤의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깨는 것이었다. 시진핑이 9명의 상무위원 가운데 서열 6위로 입성하며 7위의 리커창을 제쳤기 때문이다. 후진타오는 이 둘을 소개하며 “젊은 동지”임을 누차 강조했다.

이는 시진핑과 리커창이 2012년에도 은퇴하지 않고 활약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결국 2007년의 제17차 당 대회는 ‘시진핑 주석’과 ‘리커창 총리’의 그림, 이른바 시리조합(習李組合)을 처음 제시했던 것이다.

중국에서조차 낯선 인물이었던 시진핑은 일거에 가장 중요한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급부상을 해석하는 것이 곧 국제정치의 미래를 점치는 과정과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커다란 업적이 있다기보다는 심각한 흠결이 없는 것으로 중국 정치의 정점에까지 올라선 이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글자가 필요하다. 집안의 배경[家], 결속을 중시하는 행보[結],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흐릿한 캐릭터[濁]야말로 시진핑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인 것이다.

家 - 시중쉰(習仲勳) 없이 시진핑은 없었다

시진핑은 소위 태자당(太子黨) 계열로 분류된다. 당(黨)이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지만 태자당이 정식 단체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중국 정치원로의 자제’라는 공통점을 부르기 편하게 지목하는 명칭에 가깝다.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개국에 가담한 원로정치인 시중쉰(習仲勳)의 아들로 1953년 6월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시중쉰은 당시 중앙선전부장을 맡은 대간부였다. 이후 국무원 비서장, 부총리로 승진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심복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시진핑은 시중쉰이 정치적으로 전도유망하던 시기에 태어나 주요기관들이 밀집해 있는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많은 태자당들이 그랬듯 귀족적인 생활을 했을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이는 엄격함과 검소함을 추구하는 아버지 시중쉰의 품성과 관련이 있다. 시진핑은 자신의 소년기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동생(시위안핑)과 나는 주로 누나 두 명에게서 옷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꽃장식이나 분홍 계열 옷을 많이 입었다. 신발마저 꽃이 수놓아진 것이라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기 일쑤였다. 그게 너무 싫어서 아버지에게 더 이상 여자 옷을 입고 싶지 않다고 반항했지만 아버지는 새 신발을 사주지 않았다. 우리는 꽃신에 먹물을 들여서 신고 다녔다.”

시중쉰의 검소한 품성은 시진핑이라는 정치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갖는다. 오랜 공직생활을 거치면서도 시진핑은 부패사건에 연루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1994년 푸젠성위원회 서기로 일하던 당시 위안화 밀수사건이 터져 상당수 고위관료들이 관복을 벗은 상황에서도 시진핑은 오히려 반(反)부패의 기조를 세워 정치적 외연을 확장했다.

물론 시중쉰의 아들로 산다는 것이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온 가족의 인생이 부침을 겪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중쉰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한때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노화순청(爐火純靑, 푸르게 빛나는 불꽃)’이라는 찬사까지 받았던 시중쉰은 공산당의 눈 밖에 난 소설 <류즈단>에 관여했다는 모략에 휘말려 재판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공직에서 쫓겨났다.

‘류즈단 사건’은 소년 시진핑의 인생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가는 곳마다 ‘반동의 자식’이라는 박해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을 통해 공산주의 혁명전사가 될 수 있다”는 마오쩌둥의 말 한 마디를 붙잡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1969년 1월, 시진핑은 지도에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낙후된 교외지역 옌촨현(延川縣) 량자허(梁家河)에서 동굴생활을 하며 인생의 첫 번째 시련을 감내했다.

주민들과 동화된 생활로 사투리까지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시진핑은 지속적으로 정계 입문에 도전했고 결국 1972년 공청단 입단, 1974년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다. 이듬해 10월에 마을을 떠날 때까지의 7년을 두고 시진핑은 “이 시기에 나의 성장과 진보가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1982년은 시진핑이 자신의 인생을 갈라놓는 또 한 번의 선택을 한 시점이었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에 한계를 느낀 그는 더 이상의 중앙 진출을 도모하지 않고 ‘조자룡의 고향’이라는 명분을 제외하면 촌구석에 지나지 않는 정딩현(正定縣)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이는 주변에 있는 고위 간부의 자제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통념을 깨는 이 행보야말로 그의 정치인생에 다양성을 부여하며 그가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보다 모든 조건에서 압도적이었던 리커창을 제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군(軍) 경력과 ‘밑바닥 경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태자당의 일반적인 캐릭터와는 달리 시진핑은 아주 어려서부터 개성을 숨기고 튀지 않는 삶을 사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면서도 시중쉰의 후광은 가는 곳마다 존재감을 부여했다.

결과적으로 시진핑은 집안[家]이라는 변수를 통해 남들과 다른 경험을 했고, 고유한 성격을 부여받았으며, 최고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

結 - 집단에 대한 충성과 결속으로 스스로를 보호

흔히 한 정치인의 커다란 성공 뒤에는 그 성공의 밑그림을 그린 ‘킹메이커’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기라성 같은 라이벌들을 제치고 역전승에 성공한 시진핑의 경우 킹메이커는 쩡칭훙(曾慶紅)이었다. 쩡칭훙과 시진핑의 결속은 시진핑의 급부상을 이해하는 키포인트다.

쩡칭훙과 시진핑은 아버지 세대에서부터 이어진 끈끈한 인연을 자랑한다. 쩡칭훙의 아버지 쩡산(曾山)은 내무부 장관으로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 베이징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두 집안은 긴밀하게 교류했고 시진핑과 쩡칭훙은 14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친형제처럼 많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이후 시중쉰의 낙마, 문화대혁명 등과 같은 파란이 있었지만 둘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쩡칭훙은 점차 장쩌민의 심복으로 성장하면서 중앙정치의 핵심인사가 되어갔다. 베이징에 아무런 인맥이 없었던 장쩌민에게 쩡칭훙은 정적(政敵)을 대신 제거해주는 든든한 우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쩡칭훙의 충성심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2002년을 전후로 일선에서 물러났으면서도 권력욕을 버리지 못한 장쩌민에 대해 쩡칭훙은 조금씩 불만을 품었다. 이는 쩡칭훙을 ‘새로운 권력’인 후진타오에 근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장-쩡의 갈등은 ‘천량위 사건’으로 폭발했다.

‘천량위 사건’이란 상하이의 일인자인 동시에 장쩌민 라인(상하이방)이었던 천량위(陳良宇)가 직권을 남용, 거액의 수뢰를 받아 300억 위안의 손해를 끼친 부패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겉포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 많다. 천량위가 파벌논리에 의해 제거된 것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갈등의 원인은 천량위가 상하이의 경제성장 기조를 관철하고 싶어 했다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원자바오 총리의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감정이 격해져 정치국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진핑이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이 행동이 결국 부패사건을 촉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 국면에서 쩡칭훙은 천량위의 기소에 반대하지 않음으로써 천량위가 실각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보탰다.

시진핑의 정치인생에서 천량위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장쩌민이 천량위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현재 시진핑과 리커창이 앉아 있는 자리에 천량위를 앉히고 싶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믿었던 쩡칭훙의 비협조적 태도로 인해 장쩌민의 꿈은 무산되었고 장쩌민은 후진타오를 견제한다는 목적 때문에 시진핑 카드에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천량위 실각 이후 상하이에 부임한 시진핑의 태도는 결속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회의를 소집한 그는 “①천량위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중앙의 뜻을 따른다 ②전체적인 관점에서 중앙의 거시경제 정책을 실시한다.”는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하며 중앙정부에 ‘항복 선언’을 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 직후부터 시진핑은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출하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濁 - 마리오네트(marionette)로 남을 것인가

시진핑의 스타일은 그가 즐겨 인용하는 관자(管子)의 말을 통해서 정리된다.

“이룰 수 없는 것은 하지 말고, 얻을 수 없는 것은 추구하지 말며, 오래 있지 못할 곳에서는 머물지 말고, 다시 못할 일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不爲不可成, 不求不可得, 不處不可久, 不行不可復).”

언제나 인화단결(人和團結)을 중시하는 시진핑은 결코 큰 그림을 먼저 제시한 적이 없다. 이미 그려진 그림에 덧칠을 해 기존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따름이다. 이것은 보시라이(薄熙來)를 비롯한 태자당들과 시진핑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며, 그가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차근차근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쩡칭훙의 도움으로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에 입성한 시진핑이 처음으로 접견한 외빈은 싱가포르의 내각고문장관 리콴유(李光耀)였다. 한 시간 동안 대담을 나눈 그는 시진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일생 동안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를 넬슨 만델라와 같은 급의 인물로 보며, 강한 감정적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미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이자 리커창의 베이징대학교 동창생인 왕쥔타오(王軍濤)는 시진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진핑은 보수적이지 않고 적극적이지도 않다. 내심에는 시비가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재능이 뛰어나지는 않다. 창의(創意)는 부족하나 사방을 살피고 남들의 미움을 사지 않는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기회가 리커창에 비해 많을 것이다.”

한 마디로 온건하고 조용하며 극도의 자제심으로 본심을 흐릿하게[濁] 숨기는 것이 시진핑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이와 같은 성격이 그의 입신양명에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했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궤적을 분석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엄중한 현실

그러나 시진핑이 내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물려받게 될 ‘국가주석’이라는 자리는 흐릿한 처신으로 연명할 수 있는 가벼운 자리는 아니다. 공산당 내부의 관계설정만이 아니라 중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에 대해서도 적합한 응답을 요하는 직위인 까닭이다.

현재 중국의 경제는 변곡점에 서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중국경제 추락에 대비하라>를 저술한 김기수 박사는 중국의 기술수준이 대단히 낮고 국민들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고려할 때 중국경제가 경착륙-연착륙을 넘어서 ‘추락’할 수 있음을 암울하게 예견하고 있다.

2012년 2분기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7.6%, 3분기는 7.4%에 그쳤다. 멈춤 없이 날아오르던 중국의 성장세가 도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나라 안팎에서는 민주화의 압박이 거세지고 있고 공산당 간부들의 부패 문제는 해결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서민적인 이미지로 많은 중국인들에게 호감을 샀던 원자바오가 물경 27억 달러의 재산을 숨기고 있다는 뉴욕타임즈(NYT)의 보도는 정경유착이 보편화되어 있는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상징하며 큰 충격을 안겼다. 공교롭게도 당 대회 개막에 임박해서 터진 NYT의 폭로는 결국 중앙위원회 구성에서 ‘원자바오 라인’의 축소를 야기했다.

일련의 상황은 중국 내부의 권력투쟁이 여전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은 시진핑과 그 일가 역시 이미 4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반(反)부패의 이미지로 많은 정치적 이득을 얻어 온 시진핑은 앞으로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지금 중국에게 필요한 것은 혼탁한 부패의 고리를 깨고 건강한 경제흐름을 만들어 내는 리더일 것이다. 이번에 선출된 중국의 제5세대 지도자들 역시 경제성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행동으로 이어지느냐다.

당장 시진핑이 국가주석으로 올라선 과정부터가 치열한 권력투쟁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성공기반을 스스로 부정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집안[家]의 배경을 발판으로 올라 서 결속[結]을 도모하는 한편 모호한 태도[濁]를 유지해 온 시진핑의 성공비결은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 과묵하고 속을 드러내지 않는 남자의 의중에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미래한국)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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