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 미래한국
  • 승인 2012.12.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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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영화산책: <모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홀로 산을 오른다. 그 걸음을 따라 장엄하면서도 애잔한 노래가 흐른다. 그렇게 산에 오른 노인은 광야 너머 멀리 펼쳐진 푸른 벌판과 숲, 잔잔한 강줄기를 바라본다.

저곳은 약속된 땅이다. 노인이 이끌고 온 무리들이 들어설 약속된 땅이다. 노인은 자신이 이끌고 온 백성들이 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번영된 나라를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자신은 그 약속의 땅에 들어서지도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노인은 삶을 마치러 산에 올라 마지막으로 그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1995년 작 영화 <모세(Moses)> 말미의 장면, 노인은 그 주인공 모세다. TV영화로, 1995년 12월 이탈리아에서 방영한 뒤 미국에선 1996년 7월에 방영됐다. <간디>의 주연으로 유명한 벤 킹슬리가 모세로 분했다.

모세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다. 그만큼 자주 영화화됐다. 찰튼 헤스톤 주연의 1956년 작 <십계>가 있고,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1975년 작 <모세>도 있다. <이집트의 왕자>라는 1998년 작 애니메이션 작품도 있다.

그런데 워낙에 잘 알려진 이야기라 식상함을 확실히 뛰어넘기는 쉽지 않은 소재이기도 하다. <십계>의 경우 요즘 기준으로도 상당한 블록버스터 작품으로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뒀지만 볼거리와 오락성에 너무 기울어진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1995년작 <모세>는 상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원래의 이야기에 매우 충실할 뿐만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다.

율법의 탄생, 그리고 정화

<십계>는 대중적이며 쉬운 영화다. 반면 1995년작 <모세>는 밀도가 간단치 않다.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대중과 이들을 때로는 꾸짖고 때로는 달래면서 이끌어가는 지도자 모세의 고뇌가 교차한다. 성찰이 있다.

<십계>는 도입부에서 감독 세실 데밀이 ‘자유의 탄생’에 대한 영화라고 설명한다. 그에 비견하자면 <모세>는 그 자유를 계속 지켜나가기 위한 ‘율법의 탄생’에 방점이 가 있다. 그래서 덧붙여 ‘국가의 탄생’에 대한 은유가 보인다.

모세가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자들을 “이스라엘을 정화하라”고 외치며 징치하는 장면은 국가 탄생을 둘러싼 내전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혹은 우리의 6.25 전쟁이 오버랩 된다.

옛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설 권리가 자동적으로 주어지진 않는다. 그를 위해선 새로운 이념과 그 구현을 위한 약속인 율법이 뿌리내려야 한다. <모세>는 그 과정이 때로 처절하리만큼 엄혹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노인과 후계자

이 영화는 3시간에 이르는 대작인데, 끝 무렵 백발의 모세가 젊은 후계자 여호수아와 이별을 고하고 산을 오르는 장면은 긴 러닝 타임 중에서도 특히 가슴을 저리게 하는 명장면이다.

왕자에서 도망자로, 다시 해방자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인도자로, 그렇게 보낸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다. 노인이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에게 말한다. “허나 가나안은 약속일 뿐이다. 한 치의 땅이라도 땀을 흘려 얻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노인이 있었고 그를 이은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도 있었다. 노인은 젊은 시절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를 떠나있다 33년 만에 돌아와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는 갓 태어나자마자 ‘붉은 우상’의 도발에 휩쓸린 나라를 처절한 투쟁으로 지켜냈다.

하지만 그는 번영을 보지는 못하고 다시 이역만리에서 생을 마쳤다. 하지만 이후 새로이 등장한 젊은 지도자가 그 노인이 세운 나라를 마침내 번영의 길로 이끌고 들어갔다. “땀을 흘려 얻은” 번영이었다.

그도 간 지 33년이 흘렀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는 또 다시 ‘붉은 우상의 유령’을 숭배하는 자들로 인해 진통을 거듭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정화’가 필요한 것인가? (미래한국)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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