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 청산이 대통합의 전제다
종북 청산이 대통합의 전제다
  • 미래한국
  • 승인 2012.12.3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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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호 편집위원

사실 이번 대선에 대해선 비교적 낙관적 전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거 하루 이틀 전부터 좀 불안한 얘기가 들려왔다. 밤새 잠을 뒤척이다 당일 날 이른 아침 일찌감치 투표장을 찾아 바로 투표를 하고 왔다.

그런데 투표율 추이가 심상찮았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던데… 오전, 몇 군데 전화를 돌려 상황 파악을 해보았다. 오전에는 통상 노년층의 투표가 집중되는데 이번에는 젊은 층도 상당히 보인다고 했다. 11시 쯤 박근혜 후보가 지고 있다는 전언이 있었다. 이후 6시까지 피를 말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생애 가장 길었던 하루

한 잡지사로부터 청탁받은 원고가 있었다. 주제는 하필이면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전망’이었다. 잡지사로서야 만약을 대비한 원고였겠지만 필자로선 좀 얄궂은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후보의 낙승을 예상했기에 선뜻 수락을 했었다. 결국에는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웬걸, 박 후보가 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원고를 써야 하나? 그러나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원고는 뒷전, 인터넷으로 추이를 지켜보며 다급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 문자로 트윗으로 메시지를 날리며 난리를 쳤다. 필자만 그랬을까? 아니었다. 많은 분들이 나중에 12월 19일이 일생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였다고 토로했다.

“오늘 저녁 6시는 대한민국과 종북 둘 중 하나가 끝장나는 날입니다. 모두가 힘을 보탭시다.” “천추의 한을 남기지 맙시다.” “강남3구 애국시민 여러분 그쪽의 투표율이 너무 낮습니다. 그쪽의 낮은 투표율만큼 져서야 되겠습니까?” 등등! 과장된 문구들 같지만 결코 작위적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종북문제는 지난 4월 총선 직후 통진당의 부정 경선 파문으로 잠시 전면적으로 표면화되는 듯했다. 그런데 본격적 이슈가 될 듯하던 종북문제가 대선전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이슈를 중심으로 점차 좌클릭했다. 중도층 공략이 시급하다 생각했을 터였다.

그런데 박근혜 문재인 양자대결 구도가 확정되면서 변화가 왔다. 좌우대결 구도가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것은 문재인 측 스스로가 초래한 변화였다. 자신이 먼저 색깔을 ‘선명히’ 드러낸 것이다. NLL 문제가 이슈로 부상했다.

종북문제, 대선의 최종 이슈가 되다

하지만 문재인 측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입장 정리를 하지 않고 계속 불투명한 자세를 보였다. 그러면서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했다.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운운하고 취임식에 북측 인사를 초청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는 당연히 강력한 대응 입장을 표명했다. 안보문제를 둘러싸고 좌우대결 구도가 완연해진 것이다.

이러던 차, 또 하나의 일로 인해 상황은 결정적이 됐다. 첫 번째 공식 TV토론에서의 이정희 후보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한마디로 충격! 지금까지 희미하게 전해 듣고 흘려버리기만 했던 종북의 실체를 국민들이 적나라하게 목격하게 된 것이다.

종반전은 완전 좌우 대결이었다. 보수우파는 갖은 사연과 곡절을 접고 박근혜 후보 쪽으로 총집결했다. 경제민주화 따위는 더 이상 이슈도 아니었다. SNS 등 온라인상에선 아예 ‘종북척결’이 보수우파의 단일 기치가 돼버렸다.

문재인 측은 그런데도 물타기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보안법 폐지까지 들고 나오는 등 색깔을 더욱 선명히 했다. 왜 그랬을까? 막판에 이정희가 후보를 사퇴했다. 공개 천명은 안했지만 문재인 지지 메시지는 분명했다.

하지만 18대 대선은 결국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박 당선인은 당선 확정 후 일성으로 대통합과 대탕평을 천명했다. 그러자 반대파 나발수들도 일제히 너나 할 것 없이 그 주문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

러는 사이 종북문제는 수면 아래 잠시 가라앉고 있다. 박 당선인은 야권과의 대화 원칙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달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통합’의 규정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윤창중 당선인 수석대변인에 대한 야권 등의 공세는 ‘통합론’이 물고 늘어지는 꼬리가 될 수 있다는 반증이었다.

국공합작과 대통합

잠시 중국의 국공합작의 경우를 살펴보자. 1924~1927년, 1937~1945년 두 차례에 걸쳐 있었다. 제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이 손문의 지도 아래 있을 때고, 제2차 국공합작은 장개석 때였다. 그런데 이 두 차례의 국공합작이야말로 중국 공산화에 적잖은 기회를 제공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기 전의 중국 공산당은 결코 강한 세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 공산당의 본격적 성장 자체가 제1차 국공합작의 우산 아래 이루어진 측면이 강했다.

공산당원이 당적을 보유한 채 국민당 입당을 가능케 한 손문의 ‘연소(聯蘇) 용공(容共)’ 정책 덕분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은 공산당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위기를 느낀 장개석에 의해 깨지고 공산당의 세력은 상당히 약화됐다.

제2차 국공합작은 1936년 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는 시안(西安) 사건의 결과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에게 일본과 싸우기 위해 공산당 토벌을 중지하고 상호 협력하는 항일단일전선을 요구했고 장개석은 결국 이를 수락했다. 이 덕분에 중국 공산당은 장개석의 공격으로부터 한숨을 돌리고 세력을 상당히 정비할 수 있었다.

국공합작에는 일단은 반대하기 힘든 명분이 있었다. 국민당이 결국 공산당에 패배한 것은 자체의 부패 무능이 무엇보다도 1차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만약 손문의 용공정책이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은 우선 성장의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치항일의 명분이 강하긴 했지만 만약 장학량이 장개석의 先공비토벌 노선을 수용했다면 국민당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금 박 당선인의 대통합론을 국공합작에 곧바로 빗댈 수는 없다. 종북임을 분명하게 드러낸 통진당 같은 세력까지 포괄하는 게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북세력이 통진당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진짜 문제는 민통당이다. 민통당은 일반에 알려진 정도 이상으로 종북세력에 포섭돼 있다.

비유컨대 제1차 국공합작 때 공산당과의 당내합작을 허용한 손문의 국민당보다 정도가 훨씬 더하다. 현재 민통당은 86세대의 주사파 전대협 세력이 기간 라인을 거의 장악하고 있다. 한화갑 김경재 등 전통적인 중도우파 성향의 구 동교동 계열 상당수가 박근혜 쪽으로 넘어온 게 우연이 아니다.

이를 방치한 채 민통당과 앞으로 어떻게 국정의 동반자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신중하고 현명한 대응이 필요하다. 하지만 민통당의 이런 실상에 대해 눈을 감으면 허울에 쫓겨 암적 세력을 더 키워주는 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종북척결 문제는 통합의 명분 뒤로 미뤄둬선 안 된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위한 ‘진정한 애국적 통합’의 대오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종북청산을 대통합의 한 전제조건으로 내걸 필요가 있다.

물론 박 당선인 자신이 공식화하는 데는 부담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새누리당은 입장을 분명히 해서 기왕에 획득한 대야 주도권의 고삐를 더욱 강화하는 게 현명하다.

덧붙여 보수우파 시민세력의 종북척결 투쟁에 애써 지원은 아니래도 최소한 공개적 딴지만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우파 시민세력은 알아서 할 일을 할 것이다. 염화시중(拈華示衆)의 협력이라 생각하길 바란다. (미래한국)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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