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은 정치 영화다?
<레미제라블>은 정치 영화다?
  • 이원우
  • 승인 2013.01.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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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몸통임에도 ‘정치’라는 깃털에만 집중하는 편협함


영화 <레미제라블>의 흥행세가 뜨겁다. 지난 6일 영화진흥위원회는 <레미제라블>의 누적관객수가 420만을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455만 명을 동원하며 뮤지컬 영화중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던 <맘마미아>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흥행할수록 이 작품에 대한 정치적 해석 또한 널리 파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1월 5일자 <한겨레>에 게재된 기사는 이와 같은 해석의 결정판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떠도는 관객들의 평을 살펴보면,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를 살아가는 <레미제라블>의 비극적 인물들을 보며 강퍅한 우리 현실을 겹쳐 보는 듯하다. 

(…) 1885년 눈을 감은 작가(빅토르 위고)는 모를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모든 인물이 나타나 더 크고 견고하게 세워진 바리케이드에 모여 노래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 눈물 흘리고 용기를 얻는 민중이 이토록 오래 역사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을.”

이와 같은 해석에는 매우 중요한 결함이 있다. 영화의 핵심소재인 ‘종교’를 아무렇지도 않게 배제해 버리는 무심함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혁명의 열병에 사로잡힌 프랑스의 복잡다단한 인간군상과 모순점을 지적한다. 이 지점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하지만 작품은 여기에서 멎지 않는다. 성인(saint)의 반열에 근접한 장발장의 사랑을 보여준 뒤 신을 향한 갈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대단원에 마무리되는 것이다(“서로를 사랑하는 건 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정치로 출발해서 종교로 끝맺음되는 구성을 취하고 있음에도 왜 사람들은 종교가 아닌 정치적 해석에만 머무는 것일까.

한 가지 실마리는 마지막 장면의 오역(誤譯)에서 찾을 수 있다. 번역자는 라스트신에서의 ‘people’을 민중(民衆)이라는 계급적 뉘앙스의 단어로 번역했다. 주인공들이 혁명을 추구했던 영화 중간까지야 이와 같은 번역을 해도 무리가 없었지만 마지막 장면은 다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을 노래할 때, 이 맥락에서의 people은 신 앞에서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을 상징하므로 ‘어린 양’이나 ‘중생’에 해당하는 단어가 적합하다.

그들은 이미 사회의 전복이 아닌 빛을 향한 갈망(climbing to the light)을 노래하는 중이다. 이 노래의 어디에 ‘강퍅한 우리 현실’이 있단 말인가?

백 보 양보해서 정치적 해석의 우위를 용인한들 혁명의 다면성을 사실적으로 추적했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 좌파들로부터 반동(反動) 작품으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해석은 자유라지만, 긴 러닝타임을 통과하며 장발장의 숭고한 희생을 그려낸 이 작품을 보고도 단편적인 정치론만을 읊조릴 정도로 한국 사회가 정치과잉(혹은 종교결핍)의 열병을 앓는 것인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모든 게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밖에는 보지 않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눈을 감은 카이사르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말 한 마디가 이토록 오래 반복된다는 사실을.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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