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청사진 그린 100년전 필라델피아 회의
대한민국 청사진 그린 100년전 필라델피아 회의
  • 미래한국
  • 승인 2013.01.21 1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만 서재필 등 주도, 미 정부 호위아래 독립선언서 낭독 · 국가 비전 제시


향후 5년, 50년, 100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까?

근 100년 전인 1919년,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주도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체제의 밑그림이 됐다는 발표가 나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달 22일(2012년 12월) 한국연구재단 주최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강좌’에서 발표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본지 편집고문)의 논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주]

=====================================================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4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는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이하 ‘총대표회’)가 개막됐다.

사흘간 진행된 이 대회에는 서재필(徐載弼)과 이승만(李承晩)을 위시해 정한경(鄭翰景) 조병옥(趙炳玉) 장택상(張澤相) 유일한(柳一韓) 등 해방 후 남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사들이 다수 참가해 각종 결의안을 토의·채택한 다음 필라델피아 시장의 호위 아래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 대회에서 서재필과 이승만은 신대한(新大韓)의 비전을 구상하고 제시함으로써 앞으로 건설하려는 새 나라의 청사진을 그리는 작업을 선도했다.

▲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의 소극장에서 개최된 한인대표자대회(The First Korean Congress)에 참석했던 대표들의 기념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민찬호, 둘째 줄의 그 다음이 정한경,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이가 서재필이다. 이승만은 서재필 오른쪽에 서있으며 옆얼굴을 보이고 있다.

필라델피아 회의가 열리기까지

서재필은 1919년 2월 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한국 대표로 뽑혀 미국 정부의 여권을 얻고자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 정한경과 이들과는 다른 목적으로 뉴욕에 도래한 장택상 민규식(閔奎植) 등을 필라델피아에서 만나게 됐다.

2월 5일에 그는 네 사람이 합석한 자리에서 이승만이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가려는 것을 ‘바보 행각’이라고 비꼬면서 그 대신 5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영문 잡지를 발간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서재필의 제의에 이승만은 하와이 동포들이 자기에게 파리행 임무를 부과한 이상 그 임무를 완수하기까지는 영문 잡지 발간에 착수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일단 협조를 보류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2월 13일경 서재필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미국 조야에 알릴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a Korean Convention)’를 개최하고 미국독립기념관(The Independence Hall)까지 시가행진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서재필은 이 제의에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가 3월 9일 조국에서 3·1운동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찬동함으로써 결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서재필과 이승만이 필라델피아의 한인대회를 소집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첫째, 3·1운동을 통해 발현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며 둘째,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하며 셋째, 파리강화회의에 문서로써 한국 독립 승인을 요청하며 넷째,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거나 달리 박해를 당한 애국지사들의 구호를 국제기구에 호소하며 다섯째, ‘우리가 독립을 회복한 후에는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쓸 것’을 공포하며 나아가 여섯째, 독립된 한국이 미 국민에게 동양 평화와 만주 개방을 보장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할 것 등을 대회의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재필·이승만·정한경 등은 초청장에서 ‘대한인국민회 총대표회의 위원’임을 자처했고 그들이 소집한 대회를 ‘대한인총대표회의’라고 호칭했다. 이것은 이 대회가 대한인국민회의 권위를 빌려 개최된 회의였음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 회의를 개최한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가 미국 국민에게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널리 선전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대회를 영어로는―미국의 독립 이전 1774년과 1775년에 필라델피아에 두 차례 소집됐던 식민지의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따서―'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라고 명명했다.

美 기마대 호위 아래 독립선언서 낭독

필라델피아 총대표회는 4월 14일에 필라델피아시 17가와 델란시(Delancey) 거리의 교차점에 있는 ‘리틀 극장(Little Theater)’에서 개막했다. 이 대회의 준비위원으로서 임시 의장직을 맡았던 서재필은 개회 벽두에 톰킨스 목사에게 기도와 축사를 부탁했으며 회의는 미국 애국가를 제창함으로써 개시됐다.

그다음 회의 참석자들은 앞으로 3일간에 걸쳐 진행될 대회의 사회를 맡게 될 의장(president)을 선출하는 절차를 밟았다. 이때 정한경의 동의와 이승만의 재청으로 서재필이 만장일치로 의장에 선출됐다.

이에 서재필은 자신이 미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한 미국시민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앞장설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미국의 국익과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사회자의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 대해 이승만이 대회 참가자들을 대표해 양해하겠다고 발언함으로써 서재필의 사회는 시작됐다.

이렇게 개시된 3일간의 대회는 시종일관 거의 영어로 진행됐는데 매일 아침 특별 연사로 초빙된 미국인 성직자들이 기도와 축사를 했고 또 미국인 대학 교수들의 연설 혹은 한국에서 갓 돌아온 선교사들의 증언과 독창·기악 독주 등 음악 순서까지 들어 있어 마치 개신교 교회의 부흥회를 방불케 했다. 리틀 극장에서 치러진 모든 일정은 민찬호(閔燦鎬) 목사의 한국말 기도로써 끝났다.

폐회 선언 후 서재필과 참가자 일동은 필라델피아市의 토마스 스미스 시장이 제공한 기마대와 군악대의 호위 하에 리틀 극장을 출발, 미국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역사적 유적인 ‘미국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흔들면서 행진했다.

일행이 독립기념관에 도착하자 서재필은 기념관 관장에게 건물의 내력 설명을 부탁했고 이어서 이승만에게 최남선(崔南善)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낭독시켰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영어로 번역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일행은 이승만의 선창에 따라 “대한공화국 만세”와 “미국 만세”를 삼창했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각자 독립관 내에 보존된 ‘자유의 종’을 오른손으로 만져보고 기념관을 관람했다. 이때 서재필은 독립관 관장의 양해를 얻어 1787년 미국 헌법 선포 당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사용했던 의자에 이승만을 앉게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상과 같이 다채로운 행사를 주관하는 과정에서 서재필은 이승만을 특별히 우대하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다. 서재필은 대회 종료에 맞춰 미국독립기념관에서 이승만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했고 만세 삼창도 선창하도록 배려했으며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앉았던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게 함으로써 참가자들의 마음 속에 이승만이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라는 인상을 각인시켰다.

이에 앞서 4월 15일 대회 도중에도 서재필은 이승만이 ‘4월 초에 만주 접경 지역에 수립된 대한공화국의 국무경(Secretary of State)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을 터뜨림으로써 이승만의 위상을 높여줬다. 이어서 4월 16일 대회에서는 아래와 같이 이승만을 대놓고 칭찬하는 발언을 했다.

“이승만 박사는 놀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인물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과거 20년간의 역사를 통해 그를 여러분의 지도자로 절대 신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열화(烈火) 같은 고난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5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 만합니다"

서재필은 자기 제자인 이승만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이자 신생 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라 믿고 남들 역시 이승만을 그렇게 인정하고 받들어줄 것을 기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서재필이 이승만을 무조건 존경하고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서재필은 이승만의 유아독존적이고 독선적인 성격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4월 14일 오후 대회에서 이승만은 자기가 기초하고 작성한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 채택 여부를 놓고 회중이 토론을 시작하려 하자 토론을 생략하자고 주장한 일이 있었다. 서재필은 이승만을 제지하면서 그러한 태도는 비민주적이라고 견책하고 토론을 강행했다.

▲ 한인대표자대회가 끝나는 날(1919년 4월 16일) 미국 독립기념관에 들어가 서재필의 권유로 과거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자리에 좌정한 이승만. 옆에 태극기를 든 정한경, 그 옆이 노디 김양.

대한민국의 청사진이 된 총대표회 결의안

서재필 의장은 미리 짜놓은 계획에 따라 결의안별로 기초(起草)분과위원회를 구성토록 한 다음 각 분과위원회에서 마련한 결의안 초안들을 전체회의에 부쳐 토의하고 채택하도록 했다.

이들 결의안은 3·1운동 후 처음으로 한인 독립운동 단체가 영문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하며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표출시킨 문건들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들 결의안은 미국에서 정규 대학교육을 받아 영어 문장력이 돋보이는 지식인들이 작성한 것이기에 형식상 잘 다듬어졌다. 그 가운데 제(5)항목은 서재필이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했던 분과위원회에서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서재필의 영향력이 작용했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총대표회에서 채택된 여러 결의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일한이 기초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제목의 제3항목 결의안이었다. 이 글은 ‘한국민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제목을 ‘필라델피아 총대표회 종지(宗旨)’라고 자의로 번역돼 있다.

이승만이 번역한 것으로 추정되는 번역문은 영문 원문을 구식 문투로 직역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그 결의안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 결의안의 주요 부분을 골라서 현대식으로 의역하고 그 내용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우리는 정부의 권력이 통치를 받는 국민에게 나온다고 믿는다. 따라서 정부는 국민의 복리를 위해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

우리는 가급적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수립하기를 원한다. 정부 수립 후 초창기 10년 동안에는 권력을 중앙정부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 수립 후 국민의 의식 수준을 미국식 정체 운영에 걸맞게끔 국민교육을 실시한다.

국민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그들의 민주주의 자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그들에게 참정권의 폭을 넓혀준다.

국민에게 군(郡)과 도(道) 단위 지방의회의 의원을 선출할 보통 선거권을 부여한다. 도의회(道議會) 의원들은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선출한다.

국회의원들은 행정부와 권력을 적절히 분담하면서 그들이 대표하는 국민에게 책임을 지고 국법(國法)을 제정하는 권한을 행사한다.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및 내각 각료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따라 행정을 한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이 선출한다. 대통령은 내각 각료, 도지사, 외교사절 등 행정부의 주요 관리들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진다...

우리는 국민교육이 정부의 어떠한 업무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믿는다. 사실상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고, 기회균등의 보장, 건실한 경제정책의 추구와 세계 각국과의 자유로운 교역 등으로 전 국민의 생활 수준을 무한히 높이고자 한다.

▲ 1921년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 단장과 서재필 부단장.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와 공화제 건설 제창

결의안에 표출된 서재필과 대회 참가자들의 신대한 건국 구상은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선포된 다른 여러 임시정부의 헌법 내지 약법과 비교해볼 때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1)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 건설론, 2) 미국식 공화제 정부 수립론, 3) 정부 수립 후 10년간 중앙집권적 통치 필요론.

물론, 서재필과 이승만 등의 정치 구상은 철저히 친미적이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특수한 입장에서 한국 민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음 속 깊이 한국을 사랑했던 한국계 미국인 내지 재미 한국 독립운동가로서 일찍이 조국에서 개혁운동을 펼쳤던 경험을 살리고 미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아 살면서 국제적 안목을 가지고 한국 문제를 심사숙고한 끝에 짜낸 지혜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정치 구상은 한국 독립에 관심이 있는 많은 국내외 지성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지녔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재필·이승만과 비슷한 경력을 가진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창호·김규식·조소앙·신익희 등도 그들의 구상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공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서재필과 이승만 등 총대표회 참가자들의 신대한 건국 구상은 1919년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필라델피아 총대표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가운데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에 내포된 미국식 공화제 채택 주장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안창호 등에게 수용돼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추진된 제1차 헌법개정에서 임시정부의 의원내각제 정부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등에 표출된 미국식 대통령중심제 선호 사상은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 당시 제헌국회 의장직을 맡았던 이승만을 통해 대한민국 헌법에 반영됐다.

그리고 총대표회 참가자들이 구상했던 신대한 건국 청사진 가운데 건국 후 10년간 훈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1948년 이후 이승만이 12년간 남한을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함으로써 사실상 실현됐다. (미래한국)

유영익 미래한국 편집고문 · 국사편찬위원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