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위기, 날조가 진실을 덮고 있다
북핵위기, 날조가 진실을 덮고 있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2.14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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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합의를 해놓고 약속을 안 지킨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미국도 약속해놓고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전 정부의 약속을 뒤집어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어제 13일, 노무현 정권의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원광대총장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통해 북핵위기의 원인이 미국의 불성실한 합의불이행에도 있다는 주장을 폈다.

정세현 前장관의 이러한 발언은 그의 사견이라기보다, 진보진영의 일반적 시각이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해서 북한 핵위기가 왔다는 주장에 아예 ‘미국의 약속 불이행’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전형적인 북한의 억지 주장이 전 통일부 장관의 입에서 태연하게 나오는 광경은 눌랍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세현 전 장관의 그러한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다시 말해 북한이 핵협상을 파기한 사례중에 북한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런 사례는 없다는 점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러한 사례를 북한 뿐만 아니라, 진보좌파 매체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 댔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정세현 전 장관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한 것일까.

여기에는 노무현 정권이 가능한 축소시켜 온 한 사건이 국민들의 뇌리 속에 자리하고 있고, 종북진영은 그것을 최대한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즉 북핵위기가 온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1994년 북한에 약속한 경수로 건설사업과 중유공급을 일방적으로 중단했기 때문이라는, 북한의 공들인 날조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쉽게 찾아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북핵위기를 가져온 ‘미국의 배신’설은 사실일까.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북핵은 미국 책임’?

북핵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1994년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4년 그해, 북한 핵문제로 한때 미국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 공습파괴를 검토했었다. 이때 카터가 북한을 방문해 핵동결을 조건으로 에너지 공급에 합의한다. 그것이 바로 제네바협정이다.

제네바협정에서 북한은 개발중인 핵시설을 동결하는 대신, 2005년까지 1000메가 와트급 경수로 2기 건설과 미국으로부터 매년 중유 50만톤을 공급받기로 한다.

이때 조건은 북한이 흑연감속로와 핵 관련시설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해체하며, 5 MWe에 사용한 핵연료봉은 안전조치 후 제 3국으로 이전하기로 하는 것이었다.

경수로 건설의 비용의 70%는 한국이 부담하기로 결정됐다. 이로 인해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설립됐고 1997년 8월, 금호지구 경수로 사업부지에서 착공식이 있었다.

그러다가 IMF가 왔다. 그래도 한국은 약속을 이행해서 2000년 2월 3일부로 북한에 경수로 원자로의 초기부지공사에 진입한다.

이 기간동안 미국도 약속한 중유를 계속 북한에 보냈다.
2001년 9월 4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경수로 발전소 건설허가를 발급받아 발전소 기초 굴착공사를 착공에 들어간다.

사단은 그 이듬해인 2002년에 터졌다.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한이 안전조치를 취해야 할 기존의 핵연료봉 처리 문제에 대한 IAEA의 검수문제가 발생하자, 북한은 돌연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고 시인했다. 핵연료봉을 안넘기겠다는 심사였다.

북한의 그러한 발언은 스스로 제네바협정을 위반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은 큰 충격을 받았고 IAEA는 패닉에 빠졌다.
다시 핵사찰 문제가 발생하자 북한은 2002년 12월 27일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관을 추방해버리고, 2003년 1월 10일에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탈퇴를 선언함에 따라 제2차 북핵문제가 대두된다.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은 이때 일어났다. 미국이 경수로 건설을 포기하고 중유공급을 중단해 제네바합의가 깨진 것이 아니라, 북한이 제네바협정을 정면으로 위반했기 때문에 미국의 중유공급이 중단된 것이 팩트다. 결국 KEDO의 경수로 사업도 이 시기에 깨졌다.

북핵위기는 김정일의 ‘판 뒤집기’의 결과

당시 북한은 자신들의 이러한 사정은 감추고 연일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한 뉴스는 아무런 여과없이 노무현 정권하에서 남한의 언론매체들을 통해 전달됐고, 북한의 눈치를 보던 노무현 정권은 북한의 책임을 명학하게 규명하지 않았다. 종북 진영은 북한의 주장을 퍼나르기에 바빴다.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은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는 부지불식간의 오해를 품게 됐다. 그 시기에 통일부 장관이 바로 정세현, 지금의 원광대 총장이었다.

이후 6자회담을 통한 북핵협상은 합의에 이를 쯤이면 항상 북한이 마지막에 그 합의를 뒤집고 실현 불가능한 조건을 들이밀었다. 결국 합의가 깨지면 미국은 제제조치를 강화했고, 이에 북한은 벼랑끝 전술로 나아가 다시 미국의 지원과 제제완화를 끌어냈다.

방코델타 은행의 김정일 자금 동결과 해제, 테러국 지정과 해제가 그런 식이었다.

북핵문제를 제3자 입장에서 주의깊게 연구해 온 랄프 코사(Ralph Cossa) 국제전략문제센터(CSIS) 태평양포럼 회장은 지난 2011년 본지 <미래한국>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북한이 6자회담 성공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6자회담은 실패했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진실의 순간에 이르기 전까지는 보상을 대가로 협상을 진전시키다가 그때가 오면 발을 빼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핵폐기 검증은 지난 마지막 6자회담을 갑자기 멈추게 한 진실의 순간이었다. 실패의 이유를 대자면 20페이지 보고서를 써도 부족할 것이다.”

종북세력에게 ‘진실의 순간’ 요구해야

랄프 코사의 이러한 해석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위자는 없다.
국제전략문제센터는 전 세계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글로벌 안보 컨설팅을 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편향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노무현 정권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자의 허구적 발언은 매우 심각하다. 그것이 단순한 착각인지, 아니면 고의를 가진 대남선동의 차원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이제 종북주의자들은 진실의 순간과 마주해야 할 때다. 그래야만 북한과의 대화도 가능하다.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다른 자들에 의해 밝혀질 수 밖에 없다. 그 대가는 가혹할 것이다.

“자기 죄를 자백하는 자에게는 관용을, 항거하는 자에게는 철퇴를”이라고 말한 등소평의 유훈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아닌가.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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