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익숙한 것이 좋아’
한국은 지금 ‘익숙한 것이 좋아’
  • 이원우
  • 승인 2013.02.18 1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로운 콘텐츠보다는 기존 것에 천착하는 경향 돋보여


2013년 1월 1일. 대한민국 최고의 K팝 걸그룹인 9인조 소녀시대가 신곡 ‘I Got A Boy’를 내놓았다. 2011년 10월 이후 1년 2개월 만에 돌입한 국내활동인 만큼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엔화가치 하락으로 최근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SM엔터테인먼트에게 소녀시대 컴백은 오랜만에 찾아온 호재였다.

그러나 막상 신곡이 공개된 뒤 시장의 반응은 미묘했다. 장르와 화성을 파괴한 ‘I Got A Boy’는 대중들 사이에서 뜨거운 인기보다는 치열한 논란을 유발했던 것이다.

국민적 히트를 기록한 ‘Gee’나 ‘Oh’의 연장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이 노래는 지나치게 어려웠던 셈이다.

SM은 “계속 듣다 보면 매력 있는 노래”라는 뉘앙스의 보도 자료를 계속 내보냈지만 많은 대중들은 이 노래에 ‘적응’해야 할 이유를 끝내 찾지 못했다.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 최단 기간 3천만 뷰를 달성하는 등의 기록을 남겼지만, 소녀시대와 SM에 필요했던 만큼의 상징성을 획득하지는 못한 채 소녀시대는 짧은 활동을 마감했다.

2030마저 ‘옛날이야기’에 열광

K팝은 모든 것이 급변하는 대한민국 내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분야다. 그런 K팝에서마저 ‘혁신’이 외면당한 것에서 보듯 많은 숫자들의 한국인들은 지금 ‘익숙한 옛날 것’을 찾고 있다.

2012년은 이러한 경향의 토대가 완성된 해였다. 2012년 3월 개봉해 관객 400만을 돌파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이른바 397세대(30대‧90년대 학번‧70년대 출생)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으며 전체 개봉영화 중 여덟 번째로 흥행했다.

영화의 삽입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까지 음원차트에서 강세를 기록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주제, 알고 있는 환경, 알고 있는 작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현재 한국인들의 현주소를 적절히 요약해 준다.

2012년 7월부터 9월까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은 2030세대의 복고 지향이 갖고 있는 파급력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5%에 육박하는 시청률(지상파 드라마의 30%에 견줄 만한 기록)을 보인 이 드라마는 1997년을 전후로 펼쳐지는 ‘옛날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90년대 히트곡들까지 몽땅 음원차트 상위권으로 안착시킨 이 드라마는 통상 도전적인 세대로 분류되는 2030마저 과거의 향수에 천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2년 연말에 개봉돼 뮤지컬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기록(576만)을 갱신한 ‘레미제라블’ 또한 복고 열풍의 한 단면을 표상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된 본작은 도서시장에까지 열풍을 야기하며 ‘레미제라블 읽기 유행’을 만들어냈다.

201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 <위대한 개츠비>, <마담 보바리> 등의 영화들도 리메이크될 예정이라 영화시장의 복고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일반적인 대중문화와는 달리 원래부터 변화에 보수적인 출판시장의 복고 열풍은 <레미제라블>에서 그치지 않는다. 힐링이나 자기 계발이 여전히 ‘대세’이긴 하지만 거기에 염증을 느낀 독자들은 기존에 알고 있는 작품을 다시 한 번 접하는 데서 독서의 기쁨을 찾고 있는 것이다.

2012년 출판시장에서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등 발간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작품들이 주목 받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생소하거나 신인인 저자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랭크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 지금 ‘고전’인가

한국인들은 왜 지금 고전(古典)을 찾는 것일까.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문화에서 고전이나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작품들은 대부분 그 중심에 저자들의 깊은 신념이 깔려 있다.”

결국 현재의 한국인들 역시 ‘신념’을 찾아서 익숙한 것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가설을 수립해 볼 수 있다.

장기화될 것으로 보이는 불황은 개개인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고, 미국과 북한 정권을 포함한 동북아 모든 국가들의 리더가 교체돼 현 시점이 역사의 중대한 변곡점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상태다. 혼란스러운 변화가 연속되면서 한국인들의 ‘재활용 의지’가 호출됐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인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것은 기존에 알던 것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으려는 한국인들의 요구가 응집된 일대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인지도가 낮았던 문재인 후보와 너무 빨리 부각됐기에 퇴장도 빨랐던 안철수 후보 사이에서 한국인들의 선택은 결국 ‘잘 아는 인물’인 박근혜였던 것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의 행보는 한국사회 전반을 둘러싼 안정 지향의 흐름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을 암시한다.

지난 2월 6일 연평도를 찾아 비상대책위원회 회의를 개최한 민주통합당의 정성호 수석 대변인은 “지난 대선에서 국민이 NLL 논란 등을 보면서 불안감을 가졌던 게 사실”이라며 “북한의 핵실험이 임박한 상황에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연평도를 찾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는 결국 정서적‧정치적으로 보수화된 한국인들의 성향이 민주통합당마저 발맞출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연해졌다는 의미다. 음악, 드라마, 영화, 책 심지어는 정치에 대해서까지 옛 것을 추구하는 한국인들의 경향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확실한 정답의 실마리가 잡힐 때까지 ‘익숙한 옛날 것’에서 힌트를 얻으려는 한국인들의 복고 지향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