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스펀지가 되고 싶어요"
"통일의 스펀지가 되고 싶어요"
  • 미래한국
  • 승인 2013.02.1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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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정광성 데일리NK 객원기자


난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태어났지만 원래 우리 가족의 고향은 평양이었다. 할아버지가 평양에서 살다가 작은할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숙청을 당한 뒤 가족들이 모두 평양 밖으로 추방됐다.

이어 부모, 조부모 모두 시골 탄광마을로 쫓겨난 것이다. 난 거기서 태어나서 부모 밑에서 자랐다. 어떻게 보면 남한에 오기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고 본다.

만약 내가 평양에서 살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고 북한의 인권 상황을 비롯해 각종 실상도 몰랐을 것이다. 그냥 제멋에 잘났다고 살고 있었을 것 같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맞춰서 살 예정이다.

지금 북한 어린이들은 불쌍한 주민들 중에서도 제일 불쌍한 처지다. 그래도 어른들은 배고프면 일을 하거나 장사를 해서라도 먹고 사는데, 연약한 어린이들은 일을 하더라도 돈도 받을 수 없다.

그냥 무료로 국가에 봉사할 뿐이다. 북한에서 고교 시절 4교시 이후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와야 하던 사실이 기억난다. 거긴 남한처럼 급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삽과 곡괭이를 가져오는 게 보통이다.

오후 정규수업 2시간은 하지도 않고 그냥 건설.농촌 현장으로 나가서 아무 대가도 없이 중노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힘들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처지다.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

북한이 가장 어렵던 97년과 98년. 반 친구 한 명이 등교를 안하나까 그 집 앞에서 기다리다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일종의 감시체제다.

학교에서 월 1회 점호를 하는데 그때는 타 지역에 가지 않는 이상 모두 학교에 나와야 한다. 바로 그날이었다. 친구네 집에 가서 보니까 없길래 그냥 학교에 갔다. 다음날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했다.

이후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니 그 친구가 먼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라와 지도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떠난 것이다. 그런 어린 친구들은 약간만 영양이 부족해도 금방 병들고 먼저 가기도 한다.

꽃제비들의 경우도 대부분 어리다. 힘이 없으니 훔쳐먹지도 못하고 병도 걸린다. 이런 게 일상이다.

왜 북한에서는 자스민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우선 알다시피 북한은 통제가 가장 심한 국가다.

한 마을을 봐도 인민반별로 나누는데 보위부나 안전부 스파이들이 몇 명 있으면서 이상한 낌새를 보면 바로 보고한다. 그러면 수사가 들어오고, 가족이 다 숙청된다. 그들은 마을마다 파견돼 조사를 하라는 특명을 받는 것이다.

또 주 1회씩 같은 반 친구들이 모여 김일성.김정일의 교리를 공부하면서 한 주 동안 그 말씀을 되새기며 사상비판까지 한다. 그래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학교 당국에 끌려가거나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러니까 혁명이 일어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북한에서 시위에 앞장서다가 진압당하고 잡히면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친척까지 모두 총살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간다. 나만 죽으면 잃을게 없는데 그로 인해 잘못 없는 가족까지 죽게 된다.

나는 1989년에 태어나 2006년까지 북한에서 그렇게 살았고 부모 덕분에 결국 여기 오게 됐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DVD를 많이 봤다. 남한 영화를 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자유로움과 여유로움을 봤다.

특히 드라마 '올인'을 감명 깊게 봤는데, 여주인공 송혜교 씨가 너무 예뻐서 남한에 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희망도 가졌다. 결국 부모 친구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남한으로 오게 됐다.

오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다. 한 덩이로 가다가 모조리 잡히면 안 되니 따로따로 출발을 했다. 부모가 먼저 떠난 후에 주 1회씩 경찰들이 찾아왔다. 무서운 감시 속에 살았다.

결국 나도 탈출을 했는데 잡혀 북송당하는 게 무서워 제발 안 잡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렇게 공안과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태국 땅까지 무사히 도착했고 마침 어머니가 태국에 계셨다.

당시 태국 한인교회에서 성경과 음식을 주며 많이 도와줬고 그때 성경을 처음 읽게 됐다. 부모는 본인들이 다 무사히 왔는데 나 혼자 잡히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서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아마 이 덕에 내가 무사히 온 것 같다.

힘들었던 한국생활, 결국 신앙으로 극복

대한민국에 오고 나서 부모가 계신 대구에서 함께 생활했다. 온 지 6개월도 채 안 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험을 보게 됐다. 그땐 OMR카드 사용법도 몰라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처음엔 친구도 몇 명 있었는데 나는 북한 출신이라고 절대 얘기하지 않고 강원도 산골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하나둘씩 친구들이 떠났고 자연스럽게 왕따가 됐다.

당시의 나는 자존심이 강하고 낯가림이 심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적응도 안 되고 너무 힘들어 첫 1년은 부모를 원망했다.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

결국 나는 생각을 바꿨다. 친구들에게 내가 북한에서 왔다는 걸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다들 신기하게 쳐다봤다. 13개반 친구들이 모두 우리 반으로 와서 동물원의 동물처럼 날 쳐다보고 질문까지 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면서 친구들과 친해졌던 것 같다. 이러니 결국 마음이 편해지고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난 북한에서부터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당 간부가 되려면 출신성분이 좋아야 하는데 난 그렇지 못했다. 시험에 응시할 자격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라도 꿈을 이루자는 생각에 처음엔 서울법대에 가려고 공부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이어 남자 간호사가 되고 싶어 고교 3학년 때 수시전형에 원서를 접수시켰다. 서울에 있는 학교에 가려고 연대 간호학과, 중앙대 간호학과 및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했다.

연대‧중대는 결국 떨어지고 고맙게도 서강대 정외과에서 날 받아줬다. 들어가 보니 힘든 점도 많았다. 공부를 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계획적으로 북한에서 태어나게 하고 이렇게 단련시키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금 나는 데일리NK에서 인턴기자로 일하고 있는데 앞으로 통일이 되면 내가 그 과정에서 충격을 완화시키는 스펀지 역할을 하고 싶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나는 교회에 계속 다니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걸 북한 주민들에게 알리고, 통일 이후 남북한이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정광성 데일리NK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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