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동을 읽는 착잡한 마음
조중동을 읽는 착잡한 마음
  • 이원우
  • 승인 2013.02.1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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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일간지에서 시장경제는 이미 실종

 
상표명을 가린 채 커피를 마시게 한 뒤 품평을 들어보는 걸 ‘블라인드 테스트’라고 한다.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사이의 어디쯤에서 재배된 콩으로 세심하게 로스팅된 커피인 줄 알았더니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2,000원짜리 커피였다는 진실이 밝혀지면서 실소를 유발한다. 맥도날드의 카페 브랜드인 ‘맥카페’는 실제 테스트 결과를 바탕으로 한 광고로 굉장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블라인드 테스트는 주로 식음료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한번쯤은 신문을 대상으로 해 보는 것도 재미 있지 않을까. 최근 논란이 된 도서정가제를 다룬 다음 칼럼이 어느 언론사의 것인지 추리해 보시길 바란다. 제목은 ‘도서정가제와 동네 책방’이다.

신문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해본다면

“책은 정신적 양식을 담는 그릇이자 지식문화의 근간이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많은 나라가 도서정가제를 시행하고 있다. (…) 무리한 책값 할인 경쟁은 책방의 몰락뿐 아니라 출판의 다양성을 위협한다. (…) 길을 걷다 잠시 들어가 이 책 저 책 뒤지다 우연히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꼈던 책방은 거리의 도서관이다. 이들이 다 사라진 거리는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보기) ①한겨레 ②경향신문 ③오마이뉴스 ④프레시안 ⑤동아일보

동네책방을 지키기 위해 도서정가제가 필요하다는 논지로 쓰인 이 글에서는 따뜻한 휴머니즘의 향기가 감돈다. 경쟁을 ‘몰락’의 전조로 재단하는 태도에서는 ‘한경오프’ 특유의 선악론적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책방은 거리의 도서관’이라는 문학적 은유를 넘어서 ‘이들이 다 사라진 거리는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라고 자문하는 부분에서는 동네 책방에 대한 실존적 고민과 애수가 느껴진다.

이것이 공적인 담론을 사적인 감정으로 눙치기 좋아하는 한경오프의 전매특허임을 감안한다면 정답은 당연히 ①~④ 중에 있는 것일까?

천만의 말씀. 정답은 동아일보다. 도서정가제가 출판시장 주변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反시장적 제도라는 점을 지적한 언론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조중동은 親시장 언론인가?

발행부수와 상징성의 측면에서 동아일보를 압도하는 조선일보가 친(親)시장 언론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6년 전이었다.

2007년 7월 27일 조선일보 송희영 논설주간의 칼럼 ‘적대적 M&A가 두렵다면…’의 논지는 “적대적 M&A에 대한 경영권 방어 장치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뺏기기 싫으면 알아서 잘 하라’는 논리다. 이런 얘기는 소년조선일보 논설주간도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기업이 누군가의 사적(私的) 소유물임을 간과한 이 발상은 조선일보가 경제를 바라보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시장경제가 개개인에게 훌륭한 시스템이라고 보는 시장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그들 기준의 국익(國益)에 유용하다고 판단될 때만 지지하는 기회주의적 국가주의자일 뿐이다.

송희영 논설주간은 최근 칼럼을 통해 지속적으로 불황의 위기를 설파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자본주의4.0 시리즈’라는 지적 사기극에 충실히 복무하며 경제민주화의 배경음을 깔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의식도 엿보이지 않아 뭘 어쩌자는 건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보수언론을 대표하는 이들이 정통 시장경제에 무지하고 때로는 그것을 부정하는 이 상황은 어디에서부터 초래된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가 조중동으로 하여금 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한 하나의 계기가 됐음은 확실하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했지만 2008년의 조중동은 ‘시장경제로부터의 도피’를 했던 것이다.

중앙일보의 야심작으로 2007년 창간된 중앙SUNDAY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9월 21일 아예 신자유주의의 종언(終焉)을 고한 바 있다.

자유시장의 마지막 쿼터백으로 불렸던 헨리 폴슨 美재무장관이 시장개입 결정을 내리며 공적자금을 투입했던 국면이었으므로 뒷일을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위기로 자본주의가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장하준이 자유주의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허나 금융위기가 초래한 것은 자유주의의 종언이라기보다는 국가주의의 부활이었다. 2008년의 헨리 폴슨은 중국이나 중동의 국부펀드에 주도권을 넘길 바에야 시장 개입이 낫다고 판단한 ‘미국의’ 재무장관이었을 뿐이다. 이 경향은 최근까지 이어져 일본의 환율전쟁에 대해서는 조중동도 열심히 보도를 해대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의 트라우마

2008년 헨리 폴슨의 결정이 미국의 재정절벽 위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한 어떻게 오바마의 포퓰리즘으로 연결되는지를 추적했어야 마땅한 3대 일간지는 지금 멍한 표정으로 동반성장위원회의 ‘재벌빵집 제한’ 같은 코미디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헛기침이나 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3대 일간지 사시(社是)에 자유주의 시장경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급기야 종편 출범과 함께 민낯을 완전히 드러낸 조중동의 모습은 소위 보수(保守)의 기준과 가치관을 고민하게 만든다. 보수언론과 시장경제가 이토록 느슨한 관계여도 상관없는 것인가? 조중동이 경제섹션을 따로 발행하는 이유는 그들의 시장경제가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개별적 체계이기 때문인가?

조중동을 대상으로 한 슬픈 블라인드 테스트가 계속되는 한, 그리고 그 신문들을 보수적 가치관의 대변자로 이해하는 독자들과 정치인들의 고정관념이 깨지지 않는 한 한국사회의 지적 황폐함과 가치혼란은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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