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위한 투쟁의 전설
자유를 위한 투쟁의 전설
  • 미래한국
  • 승인 2013.02.28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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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영화산책: <알라모(The Alamo)>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나귀에 탄 어린 딸이 이렇게 물었지만 엄마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사방에 도열한 병사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떠나는 모녀에게 예를 갖추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기 앞을 지나가자 자신도 모자를 벗고 정중히 예를 표했다.

1960년 작 영화 <알라모(The Alamo)>의 마지막 장면이다. 엄마가 딸의 물음에 답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빠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었다. 전사(戰死)였다. 모두 죽었다. 영화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린 흑인 노예 소년을 포함한 이들 모녀 일행 세 명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실화다. 1836년 2월 23일부터 3월 6일까지 알라모 요새에서 텍사스 인과 멕시코 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소재로 했다. 텍사스 독립전쟁 중의 전투였다. 당시 텍사스는 멕시코의 일부였는데 텍사스 인들은 1835년 10월 독립을 선언하고 멕시코 군과 전쟁에 돌입했다.

알라모 전투는 이 텍사스 독립전쟁 중 벌어진 전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우선 전략적 측면에서 알라모 전투는 멕시코 군의 발을 묶어 텍사스 독립 주력군이 전력을 정비할 시간을 확실하게 벌 수 있게 했다.

텍사스 독립군이 최후의 승리를 얻은 발판이었다. 그런데 알라모 전투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된 것이다.

텍사스 독립전쟁은 단순히 멕시코에서의 분리가 아니라 ‘텍사스 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하나의 혁명이었다. 당시 알라모 요새에 집결한 민병대는 180여 명 남짓, 이들을 포위한 산타 아나(Santa Anna)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군은 최대 6천 명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라모의 사람들은 압도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13일을 버티다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 텍사스 독립혁명의 불멸의 상징이 되는 순간이었다.

텍사스는 1836년 4월 21일 마지막 전투의 승리로 독립을 확정지었다. 텍사스 공화국은 이후 9년 간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다 1845년 자발적으로 미국의 한 주로 편입됐다. 28번째 주였다. 이런 치열한 역사 덕분에 텍사스에는 지금도 스스로를 텍산(Texan)이라 일컬으며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알라모 이야기는 미국민 전체에게도 자유를 위한 투쟁의 중요한 발자취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듭하여 작품화되는 이유다. 1960년뿐 아니라 1987년에 이어 2004년에도 또다시 영화화됐다.

1960년 작 <알라모>에는 그 유명한 존 웨인이 주연의 한 명으로 출연했다. 그런데 존 웨인은 출연만이 아니라 제작과 감독까지 맡았었다. 그는 미국인들로부터 서부극의 대명사로까지 여겨지며 사랑받은 배우였다.

존 웨인은 미국의 자유의 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애국자였다. 그는 리버럴한 할리우드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반전운동이 휩쓸던 1960년대에도 보수 우파적 애국주의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켰다.

한편 이 작품은 주제가 ‘The green leaves of summer’도 매우 유명하다. 결전을 앞둔 전날 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전의를 다지면서도 잠을 못 이룬다. 배경으로 이 노래가 잔잔히 그러나 힘차게 흐른다. 과연 자유는 죽음을 불사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시대와 장소를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알라모>의 노래가 울려온다.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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