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이승만의 자주외교에서 배우자
북핵, 이승만의 자주외교에서 배우자
  • 미래한국
  • 승인 2013.03.1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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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철저한 용미·자주외교를 통해 한미동맹을 이끌어냈던 ‘외교의 신’ 이승만 대통령이 오늘날 만약 살아 있었다면 북핵문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의 과거 업적이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건국된 지 약 2개월 후 미국 CIA에 의해 작성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가능성’이라는 보고서가 있다. 여기에는 ‘이승만의 인격’이라는 제목의 부록이 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이승만은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진정한 애국자다.” 그만큼 이승만에게 있어 국익이 걸린 문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최고의 목표였다.

이승만은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며 약소국(弱小國)의 대통령이었으나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이 걸린 일에는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경무대 비서였던 황규면 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에 대해 “구미식 외교에 우리나라 형편을 고려한 나름의 독특한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며 국가 이익에 관계되는 일에 대해서는 외교의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고 <경무대 사계>에 썼다.

당대는 물론 오늘날도 이승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신’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이승만과 같이 외교에 능한 인물도 없었고, 나라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근본이 외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은 인물도 없었다.

철저한 用美·知美 자주외교

이승만은 고종폐위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서에 수감 중이던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독립정신>을 썼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9세였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독립을 떠받치기 위해 필요한 6개의 실천사항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세 번째가 강대국 사이에 있는 약소국이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매우 중요하므로 외교를 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에서 제시한 외교 철학은 건국 후 통치기에 이승만 특유의 소신 있는 자주외교로 실천됐다.

<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 예일대 석좌교수는 2006년 8월 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북한의 미친 정권과 4대 강국의 포위라는 두 가지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도전 때문에 한국은 특히 외교를 중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우리 언론은 폴 케네디 교수의 충고가 획기적인 국가 생존전략이라도 되는 듯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청년 이승만은 이미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의 생존전략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외교로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삼고, 미국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제사회의 냉엄함과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체험했다.

그것은 우리의 독립은 전적으로 미국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해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을 확실하게 잡아둬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체득된 것이다.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철저하게 국익에 바탕을 둔 용미(用美)·지미(知美)의 자주외교였다. 대통령으로서 이승만 외교전략의 특징은 성동격서(聲東擊西)격 또는 일거양득(一擧兩得)형이었다. 그는 하나의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언제나 복선적 외교를 구사하는 고차원의 외교전략가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반공포로 석방’은 일거양득(一擧兩得)형 외교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한미동맹을 체결하기 위한 벼랑끝 외교전략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반공포로 석방이 한미동맹 체결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됐지만 그러한 해석은 이승만의 진면목을 간과한 미시적 접근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이승만에게 반공포로의 생명이 걸린 문제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 포로는 벌써 다 석방시켰어야 할 터인데…”로 시작되는 반공포로 석방 당일 발표한 이 대통령의 담화문에서도 확인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광주 중앙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빨치산 포로 4만8천 명을 석방했다. 이것은 그후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시 중앙포로수용소 소장이었던 송인섭 소령(포로 석방 이후 중령으로 진급)에게 “송 중령, 내가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송 중령 덕이야. 광주포로수용소에 갔을 때 빨치산 포로들이란 자들이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눈물을 흘렸지. 같은 피를 이어받은 동족끼리 싸우고 난 뼈저린 좌절감이 그때 나를 엄습했었지. 내가 그때 포로들을 석방하지 않고 처치했다면 두고두고 한이 되었을 거야”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반공포로 석방은 인권에서 출발

이승만에게는 반공포로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던 것이다. 즉 한미동맹 체결을 위해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니라 반공포로의 인권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한미동맹이라는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방문 중 한미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시행한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은 성동격서(聲東擊西)격 외교의 좋은 사례가 된다. 한표욱은 이때의 상황을 <이승만과 한미외교>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직전에 서울에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 측 대표단을 내쫓게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한 외교적 술수였다. 이 대통령은 틀림없이 미국 측이 일본문제를 꺼낼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카운터펀치로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단행한 것이었다”라고 기술했다.

이승만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산 측 중립국감시위원단을 나라 밖으로 내쫓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의제에 오를 일본문제 또한 봉쇄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상회담 개최 전날 중립국감시위원단을 내쫓는 조치를 취했다. 아이젠하워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을 내쫓은 것에 대해 항의했고 이승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립국감시위원단의 간첩행위를 거론하며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했다.

이 일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의 허를 찌르며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 근거를 마련하고 미국 측의 일본 관련 대한(對韓) 정책에 대해서도 제동을 걸었다. 이후 두 정상 간의 회담에서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한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전쟁의 와중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던 반공포로를 석방함으로써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함과 동시에 국제사회의 비난을 봉쇄하고 한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한미동맹을 체결했다.

또한 국익이 걸린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대한 타당성을 입증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수긍하도록 만든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외교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진실함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 자신의 원칙에도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외국과의 교섭에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사실대로 진실 되게 대하며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임기응변이나 권모술수를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대통령으로서 갖춰야 할 외교전략의 제일 덕목이다. 그가 지금 살아 있다면 용미·지미의 자주외교 정신을 통해 북한의 핵위헙에 맞서 핵무장론을 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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