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유린한 문화체육관광부
‘민중’을 유린한 문화체육관광부
  • 이원우
  • 승인 2013.03.15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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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한강의 기적> 대관취소 내막
 

작년 2012년 12월 7일. 대선을 2주 앞둔 이 때 서울연극협회 회장인 연출가 박장렬을 포함한 연극인 40여명이 대학로의 한 공연장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문재인 후보 지지 연극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18대 대통령은 지난 5년간 쓰러진 민주주의와 인권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고, 우리 국가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바로 문재인 후보여야 한다.” 이들은 뜻을 같이 하는 선언자 825명의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던 대선 판도에서 ‘문재인 지지’를 선언한 문화예술계와 학계의 지식인들‧예술가들은 많았다. 공개 선언을 한 연극인들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다만 박근혜 후보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한 연극인 단체는 전무했다. 그렇게 대선은 다가왔고, 승리는 박근혜 후보의 몫으로 돌아갔다.

대선 결과로 인해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대 ‘패닉’을 경험했다는 후문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나 문화예술계에서 그녀의 당선을 ‘역사의 후퇴’로 규정하는 것은 거의 상식 수준의 얘기였다.

민중극단 ‘朴비어천가 의도’ 없어

1963년 창단돼 올해로 50년의 역사를 갖게 된 민중극단이 2013년 공연을 위해 한국공연예술센터(HANPAC)에 대관신청서를 낸 것이 바로 작년 대선 무렵이었다.

연말에 신청서를 내면 4월 이후로 대관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 이들은 상연작품으로 유진 오닐의 <얼음상인 돌아오다>를 신청했다. 국내초연으로 아직 번역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작품이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한팩의 대관 승인은 2월 14일부터 24일로 배정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시작되었다.

시간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민중극단은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얼음상인 돌아오다>를 상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복잡한 절차를 거쳐 한팩 측에 작품 변경 신청을 해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라는 작품으로 다시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이 작품 준비 과정에서도 작가와의 이견이 생기면서 준비는 다시 한 번 난항에 봉착했다.

민중극단에게 2013년은 창단 50년이라는 무거운 의미가 있는 시기이기에 극도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선 결국 익숙한 작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11년에 이미 상연한 바 있는 <한강의 기적>이 물망에 올랐다.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이라는 거인들이 우연히 한 시대에 만나 활약하는 내용을 연극으로 옮긴 이 작품을 정해놓고 보니 ‘제3공화국 출범 50년’이라는 의미도 부여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민중극단 정진수 감독의 설명이다.

 

문제는 이미 한 차례 작품변경 신청을 한 바 있는 민중극단이 재차 작품변경 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연말 업무처리와 인사이동으로 어수선했던 한팩은 여러모로 절차가 복잡한 ‘작품변경’이 아닌 ‘제목변경’으로 <한강의 기적> 상연을 처리했다.

어차피 민중극단이 2월 14일부터 24일까지 한팩의 대학로 극장을 사용한다는 것은 정해진 상황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편법이다.

이종일 대표를 포함한 민중극단 측에서는 이 문제를 염려해 한팩 측에 문의를 했지만 오히려 한팩 측에서 “괜찮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 민중극단의 설명이다. 민사소송을 준비 중인 민중극단은 현재 한팩과의 의사소통 내역을 전부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젊은 연출가의 문제제기

일부 언론은 마치 민중극단이 다른 작품을 공연할 것처럼 승인을 받아 놓고 게릴라 같은 방식으로 교묘하게 <한강의 기적>을 준비한 것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민중극단이 이 작품을 공연한다는 사실은 이미 최치림 한팩 이사장(2012년 말 퇴임)까지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민중극단과 정진수 감독은 2010년에도 <6.25전쟁과 이승만>이라는 작품을 상연한 바 있으며 이때는 심지어 한팩과 공동주최까지 했으므로 유독 <한강의 기적>만 문제가 될 것이라고 판단할 정황은 어디에도 없다.

민중극단과 <한강의 기적>이 커다란 쟁점이 된 것은 대관절차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로부터 출발했다. 서른 살의 연극연출가 이경성이 1월 28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장문의 글을 올리면서부터 아직 상연되지도 않은 <한강의 기적>이 연극인들의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어제 우연히 동료들과 함께 한팩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 2월 호를 보게 되었다”고 운을 뗀 그의 논지는 ‘한국공연예술센터라는 국공립단체‧극장이 5‧16을 기념하는 작품을 상연하는 건 상식(common sense)의 차원에서 말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연극이 대학로의 사립 극장에 오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그는 <한강의 기적>을 “사회 보편적인 합의를 부정하고 있는 내용의 공연”으로 규정하며 이 작품을 한팩 극장에 올리는 것은 ‘공신력’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이 젊은 연출가의 문제 제기를 언론사들이 받아쓰기 시작하면서 결국 문제는 커다랗게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한겨레>는 2월 1일 문화면 기사 ‘대통령 취임식 앞두고 공립극장서 박정희 미화 연극’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한강의 기적>이 “2011년 5월에도 서울 대학로의 한 민간 소극장에서 공연돼 연극계의 입길에 오른 바 있다”고 언급한 이 기사는 박장렬 서울연극협회장의 말을 인용했다.

그가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극장이 국민 정서에 맞지 않을 뿐더러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품을, 그것도 두 차례나 작품 변경을 승인하면서 대관을 해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장렬은 이와 같은 발언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고 결국 한겨레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 권고에 따라 3월 5일 정정 보도문을 냈다.

한겨레 홈페이지에 게재된 정정보도문 캡쳐 화면

허나 이미 민중극단은 작품이 상연되기 불과 1주일 전인 2월 6일, 한팩으로부터 ‘대관 취소’ 공문을 받은 상태였다. 공연은 부랴부랴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개최되었지만 창단 50주년을 맞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받은 ‘선물’의 불쾌감은 가시지 않았다.

급할 때 드러난 문화체육관광부의 ‘본색’

<한강의 기적> 논란을 문화체육관광부의 횡포로 규정할 수 있는 데에는 시기적 특수성이 맞물려 있다. 민중극단과 문화체육관광부 사이에 존재하는 한팩은 12월 말을 기점으로 최치림 이사장을 포함한 주요 인사가 공석인 상태다.

이 시기는 한창 민중극단이 작품변경과 제목변경을 넘나들며 한팩과 의사소통을 했던 시점이자 이경성을 비롯한 연극인들의 반발에 의해 대관 취소가 감행된 시점이기도 하다.

지휘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대관 담당자들은 결국 문화부에 보고를 올렸다. 공연대관을 취소하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도 문화부로부터였고 이는 장관의 지시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최광식 前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는 2011년 9월 20일부터 최광식 장관 체제로 이어지고 있다(※2013년 3월 11일 퇴임).

고려대학교 사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해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한국고대사학회 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장 등 주요직에 초고속으로 승진한 이력이 취임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인물이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것과 이명박 前대통령의 대선캠프 자문위원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2011년 인사청문회에서 ‘낙하산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불교신자라는 점 때문에 MB정부- 불교계의 ‘관계 회복카드’로 평가받은 부분도 있다.

해프닝과 토론 수준으로 종결될 수도 있었던 이 문제가 ‘공연 1주일 전 대관 취소 통보’로 비화된 사정에 임기 말 최광식 장관의 지나친 보신주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만약 연극인들의 반발과 그 반발을 받아쓴 언론이 없었어도 <한강의 기적>이 대관 취소되었을지 자문해 본다면 결론은 더욱 명백해진다.

‘교양 없는 공룡’이 되어버린 문화부

일련의 정황은 최광식 장관을 넘어선 문화체육관광부의 역할론으로 연결된다. 음악과 영화 분야를 아울러 한국의 많은 예술인들이 세계를 누비며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할 문화부가 오히려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앞장선다면 이는 스스로의 본분과 존재 의미를 거스르는 행동임에 틀림없다.

한 편의 연극에 대한 미흡한 대처가 ‘문화체육관광부 폐지론’으로까지 연결되는 것도 그래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은 물론이고 MB정부 하에서도 문화부가 보여준 획기적인 성과는 전무한 실정이다.

오히려 한쪽으로 편향된 예술계의 현실을 확대재생산했을 뿐이며 <한강의 기적>은 그 편린이 드러난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지난 MB정부를 ‘민주주의와 인권을 쓰러트린 정권’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언론과 예술의 자유를 탄압한다는 식의 주장은 인터넷에서 이미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한강의 기적>을 둘러싼 논란은 이들이 주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얼마든지 이중 잣대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의 가벼운 태도는 이 문제를 민중극단으로 대표되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 대처로 귀결 짓고 말았다.

민중극단은 이 문제에 대해 민사소송과 국민권익위원회 제소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문화부에 대한 문제 제기도 계속해서 이어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것은 소수의 투쟁이지만, 평소에 소수의 인권을 소리 높여 주장하던 예술인과 언론인 그 누구도 손을 잡아주지 않는 외로운 싸움이 될 것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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