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의 예술가에게
서른살의 예술가에게
  • 이원우
  • 승인 2013.03.15 1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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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 논란 촉발시킨 연극 연출가 이경성에게 보내는 편지
 

안녕? 나는 시사정론지 <미래한국>에서 글을 쓰는 이원우라고 해. 이번에 기사를 준비하면서 네 이름을 알게 되었고, 우연히 둘이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았어. 심지어 생일도 이틀밖에 차이가 안 나더라. 몇 가지 운명의 다른 연출이 있었다면 같이 공부를 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지.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반말로 편지를 쓰게 되었네.

언젠가 직접 만난다면 당연히 예의를 갖춰야겠지만, 이 칼럼에서만큼은 편하게 말하는 게 좀 더 내밀한 얘기를 끄집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어. 그러니 이 글을 한 ‘작품’의 지평에서 이해해 주길 부탁하고, 표현상의 무례함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었으면 좋겠다.

헌법과 反헌법

이번 <한강의 기적> 논란을 취재하면서 당연히 너의 페이스북 계정에도 방문을 했어. 1월 28일자 ‘안녕하세요? 연극 연출하는 이경성이라고 합니다’로 시작되는 글도 물론 읽어보았지. 그 글 한편으로 이 모든 논란이 촉발되었다는 건 아마 잘 알 거야.

네 글에서 딱 두 번 등장했지만 중요한 표현이 있었다면 ‘상식’이 아닐까 싶어. 너는 상식의 차원에서 <한강의 기적>이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상연되는 게 부당하다고 주장했어.

왜냐하면 그곳은 국공립단체가 운영하는 극장이기 때문에 공신력이 요구된다는 거지. 그리고 5‧16은 이미 헌법기관에서도 反헌법적 쿠데타라고 규정했으므로 이 연극이 잘못됐다는 건 좌우 진영논리를 떠나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낸 사항임을 너는 강조했어.

일단 상식의 출처를 헌법에서 찾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 나 역시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로서 표현의 자유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反자유‧反헌법적 표현일 경우에는 단호하게 제한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해.

다만 네가 놓친 부분은 이 연극에서 박정희의 5‧16 이상으로 정주영, 이병철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그들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만나 여러 사건을 만든 것이 역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걸 강조하고 있다고. 셋의 이야기를 정치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조망하기 때문에 5‧16은 중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작품의 본질은 아니야.

누군가 내게 5‧16에 대해 묻는다면 “그것은 분명 헌법 파괴 행위였고 쿠데타였지만, 그놈의 쿠데타 이후 한국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혁명적인 진보를 해 오늘날의 풍요가 있다. 그 과실을 전부 누리며 편하게 살아온 입장에선 100% 부정적으로만 매도하는 게 양심에 찔린다”고 솔직하게 말할 거야. 넌 어떠니?

한국 현대사는 사실 예술가들이 매우 호기심을 느껴 마땅한 소재야. 선과 악이 뒤섞인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이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진보를 이뤄낸 역사니까. 민중극단은 그 호기심에 천착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인데, 그걸 같은 예술가들이 깎아내리고 상연 취소까지 시키는 게 과연 합당한 태도일까?

최근 대학로에서 연극으로도 상연된 <레미제라블>을 예로 들어 말하면, 너의 견해는 마치 “장발장은 은촛대를 훔친 범죄자이므로 그를 미화하는 빅토르 위고의 작품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려. 은촛대 사건으로 장발장이 드라마틱한 변화를 경험한 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갑갑한 지적으로 보이는 거야. 부정할 수 있어?

안내책자만 보고 비판하는 건 몰상식

왜 이런 이해부족이 일어났을까. 이유는 간단해. 네가 작품을 직접 보고 말한 게 아니기 때문이야. 그저 한팩 홍보책자에 적힌 소개문구 몇 글자를 보고 이 작품을 판단해 버린 거지. 내가 아는 연극은 ‘무대에서 모든 걸 쏟아내는 순간의 예술’인데, 네가 하는 연극은 ‘홍보 책자에 모든 걸 쏟아내는 활자의 예술’이니?

너의 데뷔작은 2008년 ‘더 드림 오브 산초’로 알고 있어. 누군가 이 작품의 제목과 몇 가지 소개문구만 보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 모티프를 따와 서툴게 미화한 표절작”이라고 매도한다면 네 기분이 어떻겠니? 50년의 역사를 가진 극단의 작품을 문구 몇 개로 엎어버리는 게 과연 ‘상식’에 부합하는 일인가?

마지막으로는 2월 12일에 다시 글을 올린 네가 언급한 헤게모니에 대해 말하고 싶다. 미쉘 푸코를 인용하면서 너는 “표현의 자유가 성립되는 최우선 조건으로 방향성이 아래서 위로, 즉 약자에서 강자로의 상향식이 되어야 함을 지적한다”고 말했더라.

세상만사를 약자와 강자로 나누어 생각하는 푸코 식의 견해에 나는 냉담한 편이지만, 그걸 차치하고도 마치 민중극단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는 뉘앙스에는 털끝만큼도 동의할 수가 없어.

질문을 한 번 던져보자. 연극계‧예술계에서 박근혜를 지지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 거라고 보니? 그 바닥이 지난 대선 때 철저하게 문재인 위주로 갔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야.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거치면서 소위 진보가 완벽하게 문화예술계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그런데 왜 너는 저 멀리에 있는 정치적 헤게모니(새누리당 승리)를 연극계로 끌어오면서 ‘약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지.

내가 보기에 민중극단은 너희들 세계에서 헤게모니가 한없이 제로로 수렴하는, 힘없고 작은 소수자일 뿐이야. 이번 소동은 명백히 다수가 소수를 밟은 만행임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일이 이렇게 돼버린 상황에서 너의 미래를 응원한다는 가식적인 멘트는 날리지 않을게. 다만 이제 막 연극을 시작한 너와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한 나 모두가 선/악, 승/패의 답답한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야.

왜냐하면 나 역시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이 세상을 좀 더 통찰력 있게 바라보는 창작인들의 작품을 늘 기다리고 있거든. 네가 앞으로 매혹해야 할 대다수의 관객들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 측면에서 다음에 보다 좋은 계기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생기네. 이만 줄인다. 안녕.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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