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을 멈추게 하라!
바보들의 행진을 멈추게 하라!
  • 미래한국
  • 승인 2013.03.21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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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바보가 없었던 적은 없다. 동서와 고금이 다 그랬다. 그래도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수준에 머물면 그저 개그의 소재다. 하지만 책임 있는 높은 자리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때는 수많은 사람의 비극이 된다.

송양지인(宋襄之仁)

기원전 638년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주(周)나라 양왕(襄王) 14년, 송(宋)의 양공(襄公)이 정(鄭)나라와 싸우게 됐는데 남쪽의 초(楚)나라가 정(鄭)나라에 원병을 보냈다.

홍수(泓水, 허난 성에 있는 강) 가에 진을 치고 있던 양공의 군대는 강을 사이에 두고 초군(楚軍)을 맞게 됐다.

초나라 군대가 도하(渡河)작전을 시작하면서 초군의 진영이 흐트러졌다. 그러자 송의 군사(軍師) 목이(目夷)가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으니 이때를 놓치지 말고 공격하자”고 했으나 양공은 듣지 않고 초군이 강을 다 건널 때까지 내버려뒀다.

도강(渡江)한 초군이 아직 진영을 채 정비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목이(目夷)가 “이 틈을 타 공격하자”고 했으나 이번에도 양공은 듣지 않았다. 양공은 초군이 진영을 정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패하고 말았다.

송나라 사람들은 당연히 양공의 패배를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군자(君子)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할 때는 싸우지도 않고 진을 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다. 감상적 명분에 얽매여 허세를 부리다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음을 일컬음이다. 군자의 도리가 때와 임자를 잘못 만나 빚어진 희한한 우화(愚話)인데, 송양공은 이리하여 바보의 대명사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여기에는 실소(失笑)거리 이상의 엄중한 교훈이 있다.

전쟁은 나라의 중대사며 전장은 생사의 결전장이다. 수많은 병사의 생명뿐 아니라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다. 그래서 적은 자비의 대상일 수 없다. 적에 대한 배려는 곧 자신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배신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적에게도 어짊을 베풀겠다는 엉뚱한 멋 부림으로 송양공 자신은 알량한 만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겉멋의 대가로 나라는 망가지고 그 자신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년 뒤 죽고 말았다. 이쯤 되면 이건 더 이상 개그일 수가 없다.

대중지양(大中之陽)

그런데 이런 우습지도 않은 우행(愚行)의 예가 우리에게도 있다. 그것도 먼 옛날이 아니라 바로 이 시대 작금의 일이다. 햇볕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1994년 1차 핵위기 당시, 북한은 소동은 벌였지만 체제를 지탱할 힘은 없었다. 중국도 북한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화근을 근원적으로 제거할 기회였다.

그런데 김영삼 정권은 그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 시절, 햇볕정책이 등장했다. 북한에 대한 본격적 지원의 시작이었다. 남한이 앞장서서 북한이 위기를 넘기게 도와줬다.

단 한순간도 우리에 대한 적대와 도발을 멈춘 적이 없는 적에게 돈과 물자를 끝없이 퍼줬다. 노무현 정권은 심지어 노골적으로 북한을 비호하기까지 했다.

확실히 햇볕이기는 했다. 그런데 땀을 강요해 옷을 벗게 만드는 여름날 땡볕이 아니었다. 한겨울 응달에 비춰진 햇볕이었다. 당시 북한은 대내외적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겨울이었다. 동사하기 싫으면 웅크리고 동면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돌연 햇살이 찾아들었다. 난데없이 주어진 이상난동! 북한은 동사위기를 넘기고 기사회생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핵무기 체계’의 완성도 눈앞이다.

그리고 드디어 북한은 우리에게 핵 협박을 시작했다. 제네바 유엔군축회의에서 “최종파괴”를 들먹이더니 3월 5일에는 북한군 최고사령부 성명을 통해 “핵폭탄 불바다”를 운운하고 나섰다.

송양공은 그래도 적에게 ‘퍼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시대 우리네 햇볕놀이꾼들은 바칠 건 다 갖다 바치고도 뒤통수에 뺨까지 맞게 만들었다.

송양지인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신종 바보의 등장이다. 고래(古來)의 예를 따라 그 주인공을 기려 사자(四字)로 성어(成語)하니 대중지양(大中之陽)이다.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

하지만 이 신종 바보는 송양지인과는 두드러진 차이가 하나 있으니 바로 ‘미필적 고의’라는 것이다. 그냥 모자란 탓이 아니라 자발적 선택의 이적(利敵)이었다. 그런 경우의 선례가 있다. 이름 하여 ‘쓸모 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성공 뒤 레닌은 소련을 옹호하는 데 앞장선 서방의 좌파 내지는 리버럴 지식인들을 그렇게 칭했다. 볼셰비키의 기준으로는 불철저한 부류지만 어떻든 자신들의 ‘덩달이’ 노릇을 하니 유용하긴 하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바르, 버나드 쇼 등 서방에서도 일급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이들이 소련 찬사 대열에 앞을 다퉜으니 확실히 쓸모는 있었다. 물론 자신의 조국을 위해선 아무 ‘쓸모도 없는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그런데 이 바보들은 하나같이 양심을 자처했다. 신념형 바보였다는 얘긴데,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자유민주의의 대한민국에 살지만 마음은 늘 좌파적 꿈이라는 콩밭에 가 있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대개 햇볕론자들이다. 그들이 햇볕에 그렇게 집착하는 건 북한을 본질적으로는 좌파의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 여기는 심리 탓이다. 그래서 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북한의 ‘지나침’도 근본적으로 한미 등 주변이 강요한 환경 탓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선 북한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을 바꾸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대한민국을 북한에 어울리는 체제로 바꾸려는 것이니 북한에 매우 ‘쓸모 있는 바보들’이다. 즉 종북이다.

그런데 최근 ‘쓸모 있는 바보들’의 대열에 또 한 부류가 이름을 올렸다. “공산주의도 선전의 자유를 누리는 게 선진사회”라고 주장하고 그래야 “국민대통합”이라고 떠드는 자들이다. 이들은 바보답게 종북 좌파와 비종북 좌파가 구분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건 마치 우파 종북만큼이나 당치 않다. 잠시 종북반대를 외쳤던 노회찬 심상정 등을 보라! 그들은 더 이상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다. 이들이 종북과 어떤 구분이 있는가?

한국에서 종북은 좌파적 세계관의 귀결점이다. 북한은 반독재 민주화라는 극히 소박한 테마를 파고들어 종북을 만들어냈다. 좌파를 종북으로 이끄는 건 손바닥 뒤집기다.

자위적 핵무장과 내부의 적

평화적 수단에 의한 북핵 폐기는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다. 아니 처음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엄연함을 바로 보지 못한 건 고의적 바보들 때문이었다.

사태를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재래식 전력의 공세적 대북 억지전략인 작계 5027은 무력화됐다. 결국 선택은 하나다. 핵에 대한 대응은 핵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선택을 결코 회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장애물이다. 미국이 난색을 표하고, 중국은 우리에게 각종 위협적 압박을 가하고, 일본도 핵무장에 나서려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북들과 그에 포섭된 세력들이 교란선전을 펼치면 국민여론에 균열이 온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일이 북한에게만 ‘쓸모 있는 바보들’의 제압이다. 논리적 제압은 물론이고 그 조직을 무력화시키는 조치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나라에 중요한 일은 많지만 안보는 중요성을 넘어 결정적이다. 안보가 무력화되면 경제가 아무리 잘되고 복지가 아무리 좋아져도 도살장의 돼지다. 자존을 가진 국가의 국민이냐 아니면 먹잇감이냐의 기로의 순간이다. 선택은 우리 몫이다.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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