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법(禁酒法) 이야기
금주법(禁酒法) 이야기
  • 미래한국
  • 승인 2013.04.19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강호의 역사이야기
 

술은 불을 품은 물이다.

몸뿐 아니라 마음도 데우는 신통함이 있다. 때로는 스산함을 견디게 하고 흔하게는 관계를 따뜻이 한다. 하지만 이 마시는 불은 종종 미덕을 홀랑 태워먹어 무절제라는 악덕의 잿더미를 남기곤 한다.

담배가 백해무익하다지만 술도 해가 적지 않다. 술의 좋은 점을 굳이 말하겠다면 담배도 내세울 게 있다. 심지어 마약도 변호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런즉 술은 역시 좀 위험하다. 몸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도 맑음을 유지하고 싶으면 술은 안 마시는 게 맞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엄격히 말해 합당하다 해서 다 그대로 관철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술을 다루는 문제가 그렇다. 금주(禁酒)가 제도적으로 좋을 듯한데 이게 손쉬운 얘기가 아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금주령(禁酒令)의 사례가 없지는 않다. 동양 삼국도 다 그랬다. 특히 조선은 1392년 개국을 하자마자 금주령이 있었는데 태종 때는 거의 매년 그랬다. 풍류가 넘쳤다는 성종이나 황음무도(荒淫無道)했다는 연산군 때도 금주령이 자주 있었다.

특히 영조 34년(1758년) 내려진 금주령은 매우 엄격했다. 임금이 직접 백성들 앞에서 금주령을 공포했다.

모두 흉작 때문이었다. 기강을 다잡겠다는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곡물을 아끼고자 함이 주목적이었다. 술이 해악이기에 근본적으로 금지한다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구적인 법이 아니라 한시적인 명령이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술의 항구적 금지는 시도하는 나라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성공한 경우도 없었다.

이슬람권조차도 마신 술

예외는 있다. 이슬람권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술이 금지돼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배경이 좀 다르다. 국가의 법 이전에 먼저 종교적 금기였다. 국가가 뒤늦게 도입하는 법은 때로 저항에 부딪칠 수 있어도 제도에 앞서 존재하는 종교적 터부는 꽤 위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슬람권도 결코 일적불음(一滴不飮)의 문화는 아니었다. 우선 무함마드 자신이 나비즈(nabiz)라는 술 비슷한 발효음료를 즐겨 마셨다. 대추야자를 발효시킨 것인데 공식적으로는 술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알코올 음료였다.

이슬람 전성기 때 지어진 주시(酒詩)도 꽤 남아 있다. 칼리프들의 향연에서 술이 필수품목으로 등장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에도 그쪽의 상류층으로부터 술을 접대 받았다든가 술병이 즐비한 벙커를 본 적이 있다는 얘기도 있다.

술에 매우 엄격한 이슬람권이 이럴 정도니 본래부터 그런 터부가 없던 나라에서 갑자기 금주법을 시행하게 된다면 어떨 것인가? 미국이 그런 경우였는데 후과(後果)가 매우 컸다.

미국의 금주법 제정의 배경

미국에서 금주법이 발효된 것은 1920년 1월 20일이었다. 발안자였던 하원의원 볼스테드(Volstead)의 이름을 따 볼스테드법이라고도 했는데 그냥 법이 아니었다. 아예 수정헌법 제18조로 못 박은 것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겠지만 당시로선 그럴 만한 배경이 있었다.

우선 미국의 청교도적 전통이었다. 19C말~20C초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초기의 경건한 기풍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자 개신교를 중심으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특히 도시지역의 과도한 음주 풍조가 큰 문제로 지목되었다.

이것은 농촌지역과 도시지역의 문화충돌이기도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민자 그룹들과 전통적인 청교도들의 충돌이기도 했다.

가톨릭이었던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이민들은 상대적으로 음주문제에 관대했는데 경건한 청교도들의 눈에는 이들이 여러모로 미국의 전통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금주운동은 이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시작된 금주운동을 더욱 강화시켰다. 독일 U보트의 공격으로 미국상선이 침몰되자 미국은 1917년 4월 6일 본격 참전을 선언하고 4월 10일 ‘식량통제에 대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곡물 전용을 제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위스키 등 증류주의 제조를 중단시키고 맥주 도수도 2.75%까지 낮추도록 했다. 그런데 독일에 대한 증오심이 독일계 이민들의 맥주양조업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번져 아예 금지시키려는 분위기가 일었다.

윌슨 대통령은 금주법으로까지 가는 건 반대했지만 결국 1919년 10월 28일 전국금주법(National Prohibition Act)이 제정됐다. 금주운동의 승리였다. 하지만 기대와 결과가 매우 달랐다. 효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부작용까지 나타난 것이다.

범죄조직의 성장과 지하경제

당시 미국에는 이미 주류(酒類)산업이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안호위저 부시(Anheuser Busch)를 비롯해 여러 업체들이 전국적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히 모두 합법적 기업들이었다.

그런데 금주법은 주류산업을 사라지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합법적 기업가들의 손에서 뺏어 엉뚱한 자들에게 넘겨주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 거대하고 이윤 많은 산업이 조직범죄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금주법 시대(1920~1933)는 갱들의 시대였다. 갱들은 금주법이 만든 것은 아니며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급격한 성장은 거의 전적으로 금주법 덕분이었다.

영화 <대부>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이탈리아계 갱들은 원래는 아일랜드계나 유태계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그런데 금주법이 이탈리아계에 기회를 줬다. 대거 주류 밀매에 뛰어든 이탈리아계는 전방위적으로 사업을 확대해 급성장을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시카고를 거점으로 했던 알 카포네(Al Capone)였다.

알 카포네는 이탈리아계이기는 했으나 마피아에 소속되지는 못했었다. 마피아는 이탈리아계 중에서도 시칠리아계가 아닌 자는 단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 카포네는 독자적으로 ‘시카고 아웃핏(Chicago OutfiT)’을 이끌며 폭력과 살인으로 주류 밀매를 장악,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자 뉴욕 중심의 정통 마피아에게도 대접을 받게 됐는데 알 카포네는 당연히 기회를 공유하는 것으로 그에 보답했다. 이탈리아계 갱들은 이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의 성장은 치안도 치안이지만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들이 당연히 만들어낸 지하경제와 검은 돈의 문제였는데 이게 규모가 너무 컸다.

1927년 알 카포네의 한 해 총 수입은 1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니 전성기 시절 시카고는 사실상 알 카포네의 손아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 공무원, 경찰, 언론인 등 그에게 매수당하지 않은 자들이 거의 없었다.

알 카포네는 1931년 체포됐다. 체포한 자는 시카고 경찰이 아닌 연방 재무부의 파견수사관 엘리엇 네스(Eliot Ness)였다. 체포 명목은 탈세였다. 알 카포네는 11년형을 선고받고 알카트라즈에 수감됐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마피아는 계속 성장해 더 큰 화근이 돼 갔다.

1933년 금주법 폐지로 더 이상 술이 돈이 될 수 없게 되자 마피아는 마약 밀매에 본격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부터 마약에 손을 댄 것은 아니었으나 금주법 폐지 이후 과거 주류 밀매만큼 이익을 볼 수 있는 사업이 달리 없었다. 금주법의 연쇄반응이 마약의 창궐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과한 의욕이 빚은 긴 참사였다. ‘규제’라는 게 본래 그렇다. 도덕적으로 옳다 해도 때로는 결과가 영 어긋나기도 하는 게 세상 이치다. 아무리 좋은 명분이라도 현명함이 없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떨까?

이강호 편집위원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