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렛 대처의 공과(功過)
마가렛 대처의 공과(功過)
  • 미래한국
  • 승인 2013.04.2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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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대의 정치인으로 세계를 변화시킨 이는 많지 않은데 마가렛 대처가 바로 그런 정치인이었다. 그는 보수당뿐 아니라 영국정치의 전체를 변혁시켰다.

그의 민영화 열의는 세계적으로 혁명을 촉진시켰고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의지는 소련의 종말을 초래했다. 그는 국가가 강하려면 국민 개개인이 생활을 자유로이 영위하고 가능한 한 국가가 작은 부분까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영국에서 그는 좌파, 특히 석탄노동조합과의 투쟁으로 ‘여제(女帝)’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그는 낡은 보수당의 중도파와 반대론자를 침묵시키고 보수당의 거점이던 금융중심가 런던을 대개혁하는 신념을 실천했다.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대처의 혁신으로 무력해진 노동조합과 신뢰를 상실한 좌파로 말미암아 노동당을 개혁해 1997년에는 새로운 노동당 통치 13년을 예고했다.

1990년대 ‘새 노동당’은 대처리즘 중심 신조를 채택함으로써만 노동당을 폐허로부터 구제할 수 있었다. 경제활동은 민간부문에 맡기는 것이 최선의 길이고 국유화와 노동조합세력의 족쇄를 푸는 역행은 상상도 못했다.

세계무대에서도 대처는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념적 확신과 세계적으로 걸출한 인품으로 영국은 소련의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동유럽에서 공산당에 항거하는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영웅이었으며 그와 절친했던 레이건 미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해서 소련의 확장정책에 항거한 의지로 크레믈린은 새로운 사고를 품게 됐다.

공산주의 종말 이후 여러 국가가 그의 혁명과 혁신을 진심으로 포용했다. 1996년까지 러시아는 1만8000개의 산업체를 민영화했고 인도는 영국식 점진적 사회주의 유산을 해체해 기업체가 성공하도록 규제와 구속을 풀었다. 남미대륙 전역은 시장자유화를 수용했다. 그 선택과 운용이 잘됐든 못됐든 모두 영국식 표본을 지향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계추는 대처가 채택했던 원칙에서 위험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왕복운동을 하고 있다. 부유국가 대부분은 경제의 국가 지분이 최근 급격히 증가했고 규제는 민간부문을 얽어매고 있다. (이코노미스트 4/8)

마가렛 대처의 1979~1990년의 11년 집권의 치적 공과에 대해 지금 영국 조야에서 찬반 논의가 뜨겁다.

그의 업적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당시 무엇을 극복해야 했는지 회고하는 일이 중요하다. 70년대 영국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점증하는 실업에 주택가격 폭락, 세금폭등으로 어려움에 처했다. 노동조합은 국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마가렛 대처는 이미 심각하게 분열된 국가를 이어 받았다. 그의 신중한 전략과 결단으로 영국은 변신했다. 노조는 민주화됐고 노조원만 고용하던 사업장을 불법화했다. 인플레이션이 억제됐고 세금은 83% 고율에서 성장을 유발할 수 있는 40%선으로 감세됐다.

약 200만 명의 국민이 공공주택을 구입할 기회를 가지게 됐고 국영 전신전화통신과 가스사업을 민영화, 매각해 약 900만 명의 새로운 주주가 탄생했다. 물론, 혁신과 혁명에는 패배자와 낙오자가 나오게 돼 있다. 비판자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념은 ‘부의 새롭고 추가적인 창조’였지 ‘빈곤의 사회주의적 재분배’는 아니었다.

그에게 총선에서 3번씩이나 압도적 승리를 안겨준 유권자들은 그의 정책에 못지않게 그의 인품에 이끌렸다. 날로 높아가는 세계사적 인물과 평범한 중산층 가정주부의 결합이었다. 그러한 평범함이 중요했다. 그는 특권계층의 배경 없이 여성으로서 보수당 당수에 올라 총리가 됐다. (텔레그라프 4/13)

정리: 정 철 객원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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