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빅벤을 멈추게 한 여인
런던 빅벤을 멈추게 한 여인
  • 이원우
  • 승인 2013.04.2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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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투사 마가렛 대처,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


2013년 4월 8일. 마가렛 대처 서거 이후 그녀의 모국인 영국에서는 특이한 제목의 노래 하나가 음원차트 상위권으로 올라왔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 삽입곡인 이 곡의 제목은 ‘딩동, 마녀가 죽었다(Ding-Dong the Witch Is Dead).’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그저 귀여운 노래 같지만 이 노래의 느닷없는 인기에는 서슬 퍼런 뒷얘기가 숨어 있다. 대처의 삶에 비판적인 반대자들이 고의적·조직적으로 이 노래의 mp3 음원을 구매했던 것이다.

장례식을 나흘 앞둔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선 대처에 반대하는 시위대 수백 명이 등장해 ‘축제’ 한 판을 벌이기도 했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이지만 훌리건의 나라이기도 하다.

대처는 흔히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존경했던 철의 여인’이라는 표현으로 수식된다.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에서 대처가 평생 감내해야 했던 고독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 고독이야말로 ‘아웃사이더 대처’의 삶을 이해하는 키포인트다.

교육부 장관 재직 시절이던 1972년 영국의 일간지 선(Sun)은 그녀를 ‘영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여자’로 선정했다. 총리 당선 2년 뒤에는 경제학자 364명이 대처의 정책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영국 권력의 중심부에서 무려 11년간 나라를 통치한 그녀의 정치 역정은 일면 화려해 보이지만 그녀를 권좌 밑으로 끌어내린 것은 측근들의 정치적 배신이었다.

그녀는 치매에 걸린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가방을 싸는 증상을 보일 정도로 평생 온힘을 다 바쳐 일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영국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대처를 전폭적으로 사랑하진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렛 대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일궈낸 아웃사이더였다.

한 번도 소녀인 적이 없었던 소녀

마가렛 대처는 1925년 10월 13일 잉글랜드 중부 소도시 그랜섬(Grantham)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던 앨프레드 로버츠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잡화상과 양장점을 함께 운영하던 자영업자 아버지 앨프레드의 딸로 태어난 것은 기업가와 상인을 무시하던 당시 영국의 분위기에서 결코 ‘축복받았다’고 말하기는 힘든 환경이었다.

오히려 상류층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는 신분 상승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옥스퍼드에 입학할 때까지 그녀는 언제나 학교에서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지는 학생이었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버지가 자신의 힘으로 일군 3층짜리 가게에는 세계 각국의 식료품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 어떤 교육수단보다도 확실하게 자유시장을 체험케 하는 수단이 됐다.

자신이 번 돈보다 많이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근면과 절약이 미덕이라는 사실은 어린 시절 마가렛 로버츠가 체득한 진리였다.

어린 시절부터 확립된 그녀의 가치관은 그녀의 나이 19세 때 출간된 하이에크(F.A.Hayek)의 <노예의 길>을 만나면서 자유주의적 사상으로 꽃피우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사상은 결코 지식계의 ‘대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는 새로운 진리의 빛으로 깃들었고, 이것이 영국과 세계의 미래를 바꿔놓는다.

대처의 ‘정치 가정교사’로 알려진 폴 존슨에 의하면 대처는 홀로 사색하는 것을 즐겼지만 “낭만은 전혀 없었다.” 어린 시절의 그녀는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같은 작품에 천착하긴 했으나 20세기를 통과하며 점점 득세했던 감성적 공동체주의는 끝내 그녀의 이성에 둥지를 틀지 못했다.

옥스퍼드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공동체주의와 대처는 화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소녀인 적이 없는 소녀였으며 단단한 심장을 가진 철의 여인이었다.

1981년 북아일랜드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병사들이 영국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10명이 아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타협을 거부했던 대처의 일화는 그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 단호한 외골수야말로 “사회라는 건 없다”는 명언을 남긴 대처식(式) 자유주의의 진원지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요. 느끼기만 하죠.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알아요? 유권자의 기분만을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 지배당해야 한다는 거예요.”  -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 中

총리로 집권한 11년 동안 대처는 그녀 이전과는 체질적으로 다른 영국을 만들어냈다. 그녀와 노선이 다른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마저도 ‘대처 키드’로 지칭될 정도다. 현재 영국의 정치 지형에서 대처의 업적을 폄훼해서 정치적 생명력을 얻기는 쉽지 않다.

“영국의 유일한 남자는 대처”

그렇다고 대처가 처음부터 영국을 모든 부분을 하나하나 바꾸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권했던 것 같지는 않다.

집권 초기 폴 존슨에게 조언을 구한 대처는 “몇 가지의 크고 단순한 계획을 세워서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계획이란 ‘작은 정부’ 지향, 노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것, 개인(個人)의 부활, 법치주의의 확립 등이었다.

결국 탄광노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과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 몇 가지 커다란 성공이 대처를 영국 역사상 가장 재임기간이 긴 총리로 만들어 줬다.

대처 리더십의 비결은 결국 ①또렷한 가치관 확립 ②크고 단순한 목표 수립 ③단호한 실행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처 재임 당시 영국에는 “정신병 환자들도 총리 이름을 제대로 댄다”는 농담과 “영국에는 남자가 딱 한 명 있는데 그 이름은 마가렛 대처다”라는 농담이 유행했다.

물론 대처가 단순히 정신적인 강인함만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가렛 로버츠로 태어난 그녀에게 대처(Thatcher)라는 성(性)을 준 것은 남편인 데니스 대처였다. 마가렛보다 10살이 많은 데니스는 막대한 재산을 지닌 재력가로서 마가렛 대처에겐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가 돼 줬다.

세상 모두가 대처를 아웃사이더로 몰았다 해도 그녀를 보스(The Boss)라고 불러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철의 여인은 거친 정치판에서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대처는 총리 재직 기간 중에도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철의 여인>에는 총리 관저 입성 전 그윽한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마가렛 대처(메릴 스트립)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일한 아웃사이더

훌리건들이 “장례식 비용을 불우한 어린이를 위해 쓰라”는 방해공작(?)을 벌였지만 4월 17일 오전 11시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대처의 장례식은 대규모로 엄수됐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빅 벤의 종은 타종을 멈췄다. 처칠의 장례식 이후 4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170여 개의 국가에서 참여한 조문객 2000여명이 성당 앞거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가 직접 고른 성경구절 요한복음 14장 6절을 낭독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현장에는 생전에 대처와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여왕 엘리자베스 2세도 참석했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대처 서거 소식을 들은 8일 “마가렛 대처 전 총리는 영국의 경제를 살리고 지난 1980년대 영국을 희망의 시대로 이끄셨던 분이고 고인은 한·영 우호 협력 증진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셨던 분으로 유가족과 영국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고 조의를 표한 바 있다.

여전히 논쟁적인 아웃사이더지만 영국의 유명 인사들도 대처의 사망에 조의를 표했다. 특히 대처의 삶을 다룬 영화 <철의 여인>에서 깜짝 놀랄 만큼 비슷한 모습으로 대처를 연기했던 메릴 스트립의 조문은 화제가 됐다.

리버럴(liberal)에 가까운 사상체계를 가진 그녀는 “의도했든 아니든 대처는 여성의 정치적 역할에 관한 한 선구자였다”고 인정했다. 정책에 대해서는 몇 가지 비판을 했지만 “전 세계 성인 여성들과 소녀들에게 공주님이 되는 것과는 다른 꿈을 꿀 이유를 줬다”고 추켜세우며 대처에 대한 리버럴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했다.

대처는 범죄자가 아니고서야 결코 받을 일이 없을 증오와 멸시를 온몸으로 받아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철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도 결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부정부패로 본인의 명예를 더럽히지도 않았다. 그녀의 인생은 한 사람의 삶이 어디까지 ‘신념’에 충실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전범(典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과도한 비난 앞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잘못된 칭찬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처야말로 죽음 이후에도 조국으로부터 비난 받을지언정 신념으로 가득 찬 아웃사이더가 되길 선택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사상가요 행동가였던 그녀의 87년 삶은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하나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 마가렛 대처(1925~2013)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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