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되는 Great Game, 우리 선택은?
다시 시작되는 Great Game, 우리 선택은?
  • 미래한국
  • 승인 2013.05.0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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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기록문화유산 가운데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것은 ‘우스만 꾸란’이다.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Abu Bakr) 시대에 최초로 집성돼 후대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제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공동체가 크게 확대되고 개종자들이 증가하자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본(異本)이 등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우스만은 651년 꾸란 원본의 정확한 필사본을 만들고 나머지 이본들은 모두 소각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정본(定本) 꾸란이 바로 우스만 꾸란인데 이후로부터 오늘날까지의 모든 꾸란은 이를 저본(底本)으로 한다.

당시 우스만은 이 정본 가운데 4부를 쿠파, 바스라, 다마스쿠스, 카이로 등 주요 도시로 보내 해당지역의 이슬람 공동체가 보존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1부뿐이다.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돼 있는 이 마지막 한 부의 우스만 꾸란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있다.

이슬람 최고의 보물이 왜 그 본향 아랍이 아닌 중앙아시아 국가에 있을까? 14세기 말 티무르가 가져다 놓은 것이다. 페르시아에 이어 바그다드를 공략한 티무르는 이슬람 성지 중 하나인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로 쳐들어갔다.

여기에 보존돼 있던 우스만 꾸란을 티무르가 전리품으로 사마르칸트로 가져온 것이 우즈베키스탄으로 전해진 유래다. 우즈베키스탄은 이 티무르 제국을 자신의 역사적 뿌리로 간주한다.

우즈베키스탄은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5개국 가운데 하나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이 함께 독립한 나라들이다. 이들 나라 이름에 공통으로 붙어 있는 탄(tan)이라는 어미(語尾)는 영어로는 Land다. 우리말 ‘땅’과 ‘tan’이 어원이 같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 지역은 치열한 역사의 장(場)이었다. 거대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동서를 한편으로는 유목전사들이 또 한편으로는 대상(隊商)들이 종횡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몽골고원 지대와 더불어 초원의 유목제국이 흥망하던 양대 무대였으며 실크로드가 관통하던 역동적인 삶의 공간이었다.

스키타이와 흉노-훈족, 돌궐(투르크)과 위구르, 나중에는 거대한 몽골제국이 이 초원에서 드라마를 엮어갔다. 드라마는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의 제국을 마지막으로 소강(小康)에 들어갔다. 해양시대가 열리면서 내륙 실크로드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 게 한 원인이었다.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중앙아시아 초원을 떠나 인도로 진출해 무굴(몽골) 제국을 세운 것은 초원시대 종막의 상징이다.

영국과 러시아, The Great Game?

강력한 주역이 자리를 비운 중앙아시아 지역을 러시아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유럽 열강들의 시야에선 일단은 비껴나 있었다. 그런데 잊힌 듯했던 이 지역이 19세기부터 다시 중요한 각축의 무대로 재부상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뛰어든 것이다.

불을 지핀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 1807년 런던으로 정보 하나가 전해졌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에게 인도를 함께 공격해 영국에게서 빼앗자고 제안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가로지르고 러시아는 코사크 군대를 남진시켜 함께 인도로 진격하자는 구상이었다.

영국으로선 그 정보를 웃어넘길 수 없었다. 나폴레옹은 자타공인의 군사적 천재였으며, 인도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다.

영국은 이 보물을 지키기 위해 심혈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양국가’ 영국의 1차 관심은 해양로였으며 북쪽 육로로 인도가 침공당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위험이 대두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게 되면서 그 구상은 무산됐다. 하지만 영국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인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도 중앙아시아를 그냥 러시아의 손아귀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영국은 적극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시작이었다.

1842년 6월 영국 장교 두 명이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에서 지역의 아미르(아랍어로 사령관 혹은 제후)에게 처형당했다. 두 사람은 영국 동인도부대의 정보장교 찰스 스토다트 대령과 아서 코널리 대위였다.

스토다트 대령의 임무는 러시아를 제치고 부하라의 아미르와 동맹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하라의 아미르는 스토다트의 석방을 요청하러 온 코널리 대위마저 함께 처형하고 말았다. 코널리는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사람이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1815년 빈 체제가 구축됐다. 신성동맹(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여기에 영국을 포함한 4국동맹의 이중협약이 성립돼 유럽은 일단 안정기로 들어섰다. 하지만 유럽 밖에서는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치열한 각축이 벌어졌다.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와 크림전쟁(1853~1856)으로 격돌했을 때 영국은 이번에는 프랑스와 연합해 러시아를 방해했다. 멀리 중앙아시아에서도 싸움이 계속됐다. 1813년 러시아가 페르시아로부터 아제르바이잔 북부를 획득하자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 저지에 본격 나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영러는 3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여왕 시대는 러시아제국과의 세계적 격돌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멀리 극동지역으로까지 이어졌다.

극동에선 특히 영국이 불리했다. 러시아는 연해주에서 남진을 노릴 수 있었지만 영국은 교두보가 없었다. 하지만 승자는 결국 영국이었다. 종막은 1905년 러일전쟁이었다.

영국의 전폭적 지원을 받은 일본이 러시아를 꺾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1907년 중앙아시아 문제와 관련해서도 영러협약으로 대결을 종식했다. 협약의 핵심은 러시아가 더 이상 남진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1807년 런던에 ‘정보’가 전해진 때부터 헤아리면 100년간이나 이어진 각축이었다.

일본은 영러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기회를 잡은 수혜자였다. 일본에 페리 제독의 흑선이 도래한 때가 1853년 메이지유신은 1868년이다. 일본은 당시 1842년 중앙아시아 오지에서 죽은 코널리의 이름도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은 갖은 노력 끝에 영일동맹에 성공, 그 힘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조선은 반대로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러시아의 품에 안기는 길을 택했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레이트 게임’의 ‘거대한 체스판’에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은 그렇게 엇갈렸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첫 번째 게임이었을 뿐이었다.

또 다시 시작된 게임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이 성립되면서 중앙아시아 내륙은 완전히 그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접근은 소련이 전적으로 독점했다. 하지만 소련 해체 후 스탄(Stan) 국가들이 차례로 독립하면서 이 지역이 각축의 장으로 국제무대에 재등장했다.

19세기 영국과 러시아가 다투던 때는 지정학적 요인이 가장 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에 더해 막대한 부존자원이라는 강력한 유인(誘因)이 함께 하고 있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문제도 얽혀 있다. 게임의 주자도 바뀌었다.

과거 대영제국의 자리를 이제 미국이 대신하고 있다. 대치 구도는 더 복잡해졌다. 힘이 약화됐다고는 러시아는 여전히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여기에 중국이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한편 이슬람권도 종교적 동질성을 발판으로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 미국의 입장에선 부담스럽지 않은 게 없다.

중앙아시아가 중동지역의 전투적 이슬람에 휩쓸리는 것은 재앙이다. 거대하고 강대해진 이슬람권은 미국의 이익을 넘어 전 세계를 위협할 것이다.

다행히 현재로선 이 지역 국가들은 이슬람주의보다는 정교분리의 문화가 더 강하고, 이슬람 자체보다는 미국의 동맹 터키에 대한 투르크족으로서의 동질감의 구심력이 더 강하다.

문제는 중국이다. 2012년 상하이 협력기구 서미트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상들이 중국과 자리를 함께 했다. 이 지역 최고의 자원 대국인 카자흐스탄 석유자원의 30% 이상이 중국에 의해 관할되고 있다.

중국 노동자의 진출도 급격히 늘었다. 카자흐스탄 독립 이래 외국인 노동자 비중 1위는 터키였다. 그런데 2010년부터 중국이 1위가 됐다. 중국화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여기에다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이란으로 향하는 루트까지 뚫린다면?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은 중국의 입장에선 숙명적 목줄이다. 그러나 중국이 육상으로 중동까지 연결되면 이곳의 전략적 가치는 약화된다.

이런 상황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중국이 서쪽 변경에서 활로를 찾으면 다음으로 연쇄 반응이 이어질 수 있다. 남방 해양 루트에 대한 부담이 완화되고 남은 힘은 고스란히 동쪽 즉 한반도 쪽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중국이 현상유지를 기본으로 하는 지금도 중국의 태도는 북한 핵문제 해결에 큰 장애다. 중국이 현재 이상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더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앞으로 당분간 펼쳐질 가장 중대한 역사적 사건은 단연 남북통일이다. 조지 프리드먼은 지정학자로서의 자신의 가장 큰 관심 중의 하나는 “통일 대한민국이 등장 이후의 만주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몽골은 어떨 것인가? 전통적으로 중국과 적대적이며 한편으로는 바깥으로의 활로를 찾고 있다. 그 몽골의 서쪽에 중앙아시아 스탄 국가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더 많은 출구는 숙원이다. 중국이 현재 많은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주고는 있지만 일변도는 곧 독점적 종속이다.

그런데 만약 한반도에서 만주 몽골을 거쳐 중앙아시아로까지 이어지는 루트 즉 고대 실크로드 루트의 복원이 이들에게 제시된다면 어떨 것인가? 한국이 대양으로 나가는 항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마다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은 Great Korea Commonwealth

미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전략적 이익과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한미동맹을 남북대치에서의 방어적 동원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는 정도 이상으로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거듭되는 핵 협박에도 결정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중국이 앞으로 태도를 얼마나 바꿀 것인가? 중국이 우리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는 우리가 미국과 결별할 때뿐 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우리의 이익인가? 다시 중국의 속방으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다. 이런 나라와의 동맹은 역사적 행운이다. 활용 여하에 따라선 우리의 실제 국력 이상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우리가 상호보완적인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중앙아시아에 교두보를 구축하는 데 한미가 함께 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더욱이 스탄 5개국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우즈베키스탄은 그 지역 한류의 진원지며 한국을 드림으로 보고 있다.

한 발은 대양에 또 한 발은 대륙에 딛고 있는 ‘Great Korea Commonwealth’를 상상해보자. 양대양을 끼고 있는 최강국가와 동맹인 나라가 이런 구상을 못할 이유가 있는가? 게다가 우리는 성장잠재력이 고갈돼 가는 위기에 직면했다.

새로운 대외적 출구를 찾지 못하면 한강의 기적도 추억으로만 남게 될 수도 있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능동적 역할을 자임해야 길이 열린다. 자위적 핵무장의 길도 그때 자연스럽게 열릴 것이다. 강력한 대한민국이 미국에도 이익임을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이강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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