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읽기는 늘 긴장 속에 숨어 있는 해학이 있어 즐겁다. 또 상대 대화자가 소크라테스의 논박에 자신의 논리의 모순이 하나하나 발견돼 어쩔 줄 모르고 궤변에 빠지는 대목이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독자들은 바로 그 과정이 진정한 지혜의 탐구 과정임은 알게 된다.
<고르기아스> 또한 소크라테스가 연설의 대가 고르기아스, 아들뻘 되는 당돌하고 혈기 넘치는 젊은이 폴로스, 연설가였던 칼리클레스와 나누는 대화록이다.
담론의 주제는 ‘연설술(수사술)’로 번역되는 ‘레토리케(rhetorike)’다. 하지만 연설이 현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삶인가 하는 도덕론과 행복론으로 확장된다.
<고르기아스>는 초기 작품으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관점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국가>와 <법률>다음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고전이다. 소크라테스와 폴로스의 대화의 초기 쟁점은 연설술의 가치와 중요성이다. 폴로스는 전형적인 소피스트 옹호론자로 보인다.
연설술은 설득의 장인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효과적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은 특별한 기술의 활동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익숙한 경험’에 불과할 뿐이라며 논박한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에 유명했던 정치인들이 시민들에 아첨했던 구체적인 여러 사례를 든다. 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시민들에게 일당을 지급하는 제도를 만든 페리클레스도 비판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민들이 공동선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 스스로 참여하도록 노력하지 않고, 시민들의 이기적 욕구만 자극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대중에게 아부하려는 정치인들의 경향은 수천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연설가들이 공동체에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라는 관점에서 논점을 확대한다.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게 연설가가 옳고 그름에 관한 앎(지혜)을 가지고 있는가, 도덕적 문제에 관해 앎(지혜)을 가지고 있는가 추궁한다.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명제를 제기한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은 나쁘고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불의를 저지르고 처벌받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불의를 행하고도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경우 불의를 저지른 사람의 영혼 구제 기회가 날아가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연설술이 이런 불의를 고발하고 제거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적 삶의 방편으로, 또는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연설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는 방법이나 유려한 표현 기법 등이 중요할 수 있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연설가(정치가)들이 권력의 획득보다 시민의 도덕의식을 고양시키는 일에 더욱 매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정치가가 해야 할 일은 시민들이 최대한 훌륭해지도록 돌보는 것”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플라톤은 “연설술은 언제나 정의로운 것을 위해 사용해야 하고 다른 모든 행위도 그렇게 돼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역설을 통해, 연설술이 도덕철학에 기초해야 함을 명확히 한 것이다.
정치인들이 권력 쟁취 수단으로서의 연설술을 배우려 하지 말고 정치에 나서기 전에 먼저 덕을 단련하라고 주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의 이기적 욕망을 더욱 부채질하는 선동 연설로 자신의 권력 욕망을 달성하려 애쓰는 꼼수 정치인들이 판을 치는 요즘 정치인들이 읽고 성찰해 볼 대목이 많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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