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노동자’문제, 자본주의로 풀자
‘감정 노동자’문제, 자본주의로 풀자
  • 이원우
  • 승인 2013.05.16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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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상무’ ‘장지갑 회장’ 사건이 말해주는 것

 
글을 쓰다 보면 이런저런 악플에 시달린다. 나보다 20살은 어려 보이는(정신 연령 기준) 익명의 누군가가 되도 않는 맞춤법으로 “쓰레기” 운운하고 사라지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잠시나마 분노를 넘어선 슬픔을 넘어선 고독의 감정에 진입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악플 피해의 지존은 연예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응방식이 반드시 모범답안 같진 않다. 몇몇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악플 따위 신경 쓰지 않아요. 아예 확인하지도 않는 걸요”라고 말할 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애써 확인하지 않겠다는 그 심리야말로 가장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악플러들은 분명히 그 나약함에 자신감을 얻어 더욱 거센 공격에 돌입할 것이다. 맹목적인 무시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내가 생산한 수많은 콘텐츠들에 달린 악플 하나하나를 매일 확인하고 성실하게 상처받고 있다. 맞대응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내가 마음껏 글을 쓸 자유가 있듯 그들에겐 그들 마음대로 지껄일 자유가 있음을 안다. 인터넷의 무방비적 익명성에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비판할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궁극적으로 악플을 ‘상사(上司)의 질책’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과장 위에 부장, 부장 위에 사장이 있다면 사장 위에는 고객이 있다는 명제야말로 자본주의의 ABC다.

세상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고 이런저런 상사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모든 피드백에 하나하나 대응하는 것과 완전히 도망치는 것의 중간 어디쯤에 정답은 존재할 것이다.

감정 노동자 보호 논리의 함정

최근 몇 주간 대기업 임원, 중소기업 회장 등이 항공기와 주차장에서 이른바 JS, 전문용어로 ‘진상’ 행각을 벌이다가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비즈니스 석에서 라면을 끓여달라고 투정을 부리다 승무원을 가격한 (그 ‘무기’가 항공기내에 비치돼 있던 본지 <미래한국>이었다는 그럴듯한 첩보가 있다.) 대기업 상무는 근속 30년의 역사를 사표로 마무리했다.

주차장 직원을 장지갑으로 폭행한 중소기업 제과회사 회장 역시 폐업 절차에 돌입했다. 일련의 논의는 감정 노동자들에 대한 동정론과 갑을(甲乙) 관계의 병폐로까지 연장됐다.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누구일까.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인 앨리 러셀 혹실드다(1983년). 그는 “자신의 진짜 감정과는 무관하게 고객 입장에서 행동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은 결국 정신적으로 소진되고 만다”고 주장했다. 혹실드는 이 내용을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으로까지 연결하며 사회학과 교수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두 개의 충격적인 사건을 바라보며 한국 사회의 논의도 비슷하게 확장될 조짐을 보인다. “우리는 감정 노동자들의 고충을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 노동으로 인한 정신질환이나 우울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이 방향이 과연 해결로 가는 길인지 의문이 생긴다. 노동자를 시장경제의 피해자로만 치부하는 반(反)자본주의적 심리의 발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진상 고객들에게 받은 상처를 보상받고 싶다면 친절한 고객들로부터 받은 힘과 용기를 사회에 기부할 준비는 돼 있는가? 이건 마치 인터넷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악플로 인한 우울증을 산업재해로 보상해 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라면 상무’ 사건의 경우 그는 이미 비행기에 탑승하는 순간부터 골이 나 있었다. 승무원 측에서 꼼꼼하게 기록한 항공일지에 의하면 “옆자리에 사람이 있지 않느냐”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타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은 감정 노동의 구조적 병폐로 연결 짓기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말겠다’는 어느 악성고객의 뒤틀린 심사가 표출된 사건으로 한정해서 봐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업재해 등의 보상책을 동원하는 건 모든 고객들을 ‘잠재적 진상’으로 치부하는 형국이 된다. 방향을 바꿔서 남들보다 이러한 상황을 잘 해결하거나 경험이 많은 노동자들을 제한 없이 칭찬해 주는 자본주의적 대안이 온당하지 않을까.

감정 노동에서는 감정의 능수능란한 조절이 하나의 재능이다. 극단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이 발생한 뒤에 보상을 하기보다는 그것의 극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서비스의 수준을 높이면서 고객과의 관계도 건전하게 가져갈 수 있는 방편이 아닐까.

모두가 ‘돌아서면 고객’임을 잊지 말아야

물론 이것이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아무리 높은 임금을 받는 감정 노동자라 해도 나가떨어질 만큼 엄청난 내공(?)을 가진 진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00명 중 1명꼴로 드물게 나타나지만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악플 같은 고객들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자본주의 정신을 강화하는 것이 궁극적인 대안이 된다.

이번에 문제가 된 ‘진상남’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 회사 직원도 아닌 승무원, 주차장 직원 등을 너무 간단하게 하급자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이는 돌아서면 그들이 고객으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큼의 ‘자본주의 감각’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승승장구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개발해 낸 것 중 유일하게 타인의 상황과 기분에 주목하게 만드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졌다고 해도, 아니 어떤 면에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타인을 대할 때 ‘잠재적 고객’을 대하듯 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성공의 관건인 감정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의 그늘에 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이다.

일련의 사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대다수 감정 노동자들의 자부심을 손상시키지 않았길 바란다. 다른 한편으론 감정노동자가 고객보다 우위에 서겠다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와서도 안 될 것이다. 자본주의 정신의 약화가 아닌 강화야말로 감정 노동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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