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격당한 한국 출판계
저격당한 한국 출판계
  • 이원우
  • 승인 2013.05.30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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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자음과모음’ 사재기 의혹 밝혀져 … 베스트셀러 차트 존폐 논란


김연수, 백영옥, 그리고 황석영. 세 사람의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한국 문단의 유명 작가라는 점, 2012년에 신작 장편소설을 출간한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점, 그 책들의 출판사가 ‘자음과모음’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최근 세 번째 공통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SBS는 지난 7일 시사프로그램 <현장21>을 통해 출판사 자음과모음의 사재기 실태를 폭로했다. 자사의 신간을 베스트셀러 차트에 올려놓기 위해 자금력을 동원해 차트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방송은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백영옥의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 등이 출판사 사재기의 도움을 받아 베스트셀러로 된 정황을 폭로했다.

대형 온라인 서점들의 구매목록을 확보해 분석한 <현장21>은 수신인이 불명확한 허름한 집에 해당 도서들이 수백 권씩 주문된 정황을 포착했다.

출판사로부터 요구를 받고 대량의 책을 반복 구매하거나 출판사 영업팀장으로부터 정기적으로 공짜 책을 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방송하기도 했다. 결론은 대형출판사부터 중소형 출판사까지 한국 출판계에 사재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었다.

작가들 “해당 책 절판 … 치욕스럽다”

‘자음과모음’을 ‘저격’한 SBS의 방송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작가들이었다. <현장21>이 방송된 지 만 하루가 되기 전에 작가 황석영은 ‘여울물 소리’를 절판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의 50년 문학 인생 전체를 모독하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한 그는 출판사에 명예 훼손에 대한 법적 대응에 돌입할 것임을 밝혔다. ‘여울물 소리’는 황석영의 등단 50주년 기념작이었다.

김연수와 백영옥 역시 8일 절판 의사를 밝혔다. 김연수의 경우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부끄러운 일이다. (…) 소설을 쓰는 것까지가 나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출판과 유통 과정까지도 전반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 앞으로 이 소설은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미 세 권의 책은 현재 서점에서 구매할 수 없으며 중고서점에서만 거래되고 있다. 사재기와 관련해 작가가 절판을 선언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직격탄을 맞은 출판사 자음과모음은 이미 지난 2011년 12월에 출간된 에세이집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와 관련해서도 사재기 의혹에 휩싸이며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에서 구체적인 정황 증거와 함께 제기된 이번 의혹은 회사의 존폐까지 위협하는 파장을 불러왔다.

결국 작가들이 절판을 선언한 8일 강병철 자음과모음 대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자음과모음 대표로서의 모든 권한을 내려놓겠다”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가 “사옥도 매각할 것이며 원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자음과모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비롯한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지도 폐쇄됐다. ‘자음과모음 비상대책위원회’는 곧 새 전문경영인을 선출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만악의 근원은 시장 침체

이번 논란을 바라보는 출판계의 표정은 침통하다. 밝혀진 것이 ‘자음과모음’의 사례일 뿐 사재기가 이곳저곳에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자음과모음 논란은 모든 것의 시작일 뿐이라는 시각에도 다수의 견해가 일치한다.

그러나 논란에 대한 대응과 관련해서는 다소 의견이 엇갈린다. 이를 테면 조선일보는 사재기 성행의 원인으로 ①불황 타파 수단으로 합리화 ②수익 좇는 대형서점의 묵인 ③1000만 원 이하 가벼운 처벌 규정 등을 지목했다.

다른 언론들은 이 모든 소동이 베스트셀러 차트에서 비롯됐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 독자들이 베스트셀러 코너를 중심으로 책을 구입하기 때문에 출판사들이 사재기를 통해 순위를 올리는 데 집중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사재기가 출판시장의 불황과 연결돼 있다는 점에는 만인의 견해가 일치한다. 출판사가 약간의 ‘작업’에만 돌입하면 조작에 성공할 수 있을 정도로 시장이 작다는 것이다.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2012년 한해 2인 이상 가정의 월평균 도서 구입 지출액은 1만9026원이었다. 참고서와 학습교재 등이 모두 포함된 금액임을 감안하면 교양 도서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작은지를 알 수 있다. 2003년 처음으로 이 항목을 조사한 이래 도서 구입 지출액은 계속 하향곡선을 그려왔으며 2012년에는 최초로 2만원을 하회했다.

흥미로운 것은 국민들의 도서 구입비용 감소가 문화계 전반의 침체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월평균 문화서비스(공연, 전시회 관람료) 지출비용은 2003년 1만5672원에서 2012년 2만8260원으로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유독 책만 헤매고 있는 셈이다.

독자는 ‘재미’ 원해 … 차트 비난 해답일까

이는 책 시장 침체의 근본 원인이 ‘책 그 자체’에 있음을 암시한다. 유명 작가의 이름을 내세워 사재기로 차트 조작을 시도했지만 독자들의 ‘마음’까지 조작하지는 못한 셈이다. “불황이 극심해서 사재기를 했다”는 변명은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돈을 푸는 모든 행위가 궁극적인 문제들을 하나도 풀지 못함을 증명해 줄 뿐이다.

결국 이번 논란에서 얻어야 할 발전적인 교훈은 마지막 순간까지 독자들에게 주목하려는 발상의 전환이다. 대중음악계의 경우에도 21세기 초 음반시장의 침체를 경험하며 ‘멸망’ 수준까지 내려갔지만 오로지 소비자에 집중해 K-POP의 반전을 이룩한 바 있다. 현재 대중음악에도 음원 사재기 등 여러 논란이 있지만 쉽게 조작되지 않을 만큼 시장이 커진 터라 이 문제 하나로 시장이 휘청거릴 일은 없다.

출판계 역시 참신한 신인작가들을 발굴하거나 독자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기획에 천착하려는 시도가 요구된다. 물이 차면 배가 뜬다는 말이 있듯, 불황이 종식되고 나면 사재기 문제 하나로 출판시장 전체가 출렁이는 기이한 풍경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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