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전범(戰犯) 김일성
다시 보는 전범(戰犯) 김일성
  • 미래한국
  • 승인 2013.06.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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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봄 한반도에 대한 스탈린의 정책은 돌변했다. 그해 4월 모스크바에서 김일성과 회담한 스탈린은 김일성의 한반도 무력통일계획을 승인했고 이 작전에 필요한 보급품과 장비 지원에 합의했다.

남한침공계획은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 주도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은 후 이 계획을 승인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증명할 문건은 1966년 극비자료 ‘한국전쟁 이면사’에 나온다. 이 자료는 월남전 때 월맹에 대한 소련의 원조문제를 중국과 월맹관리들이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소련 외무성 요원이 작성했다. 여기에 한국전쟁 발발 원인에 관한 일련의 사건을 기록됐다.

1948년 남한의 단독 선거로 정부가 수립됐고 북한도 정권이 창건돼 남북한 관계는 악화됐다. 양쪽 모두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38선의 상황은 소련과 미국 군대가 한반도로부터 철수한 이후 1948년에 더 긴장됐다. 김일성은 미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리라고 계산하면서 한반도 무력통일 동의를 받기 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집요하게 압박했다.

처음에 스탈린은 “남한과 이렇게 거대한 사건을 벌이는 데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김일성의 집요한 호소에 유보적이었지만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1950년 3-4월 중에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스탈린이 동의했다. 이어 5월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의 지지를 확보했다.

스탈린은 인민군 부대의 추가 창설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공급을 해달라는 북한의 요구를 신속하게 들어줬다. 중국은 중국군에 있던 조선족 1개 사단을 북한으로 보내면서 만약 일본이 남한 편으로 참전할 경우 식량 원조와 중국군 1개 군단을 한반도에 보다 근거리로 이동시킬 것을 약속했다.

1950년 5월말까지 인민군 총사령부는 소련 군사고문단과 함께 인민군을 38선에 집결했고 김일성의 주장에 따라 군사활동 시작은 1950년 6월 25일로 계획됐다.

남침 때까지 북한군은 남한군보다 상당한 우위에 있었다. 인민군의 작전 계획은 매일 15~20km씩 남진하고 기본적으로 22~29일 기간에 군사작전을 완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김일성은 남침 개시 이전에 소련의 지원을 고대했고 이 지원이 불가결했음을 알 수 있다.

무기와 탄약 공급 이외에 소련은 전투계획 입안을 위해 대규모 전투 경험이 있는 군사 고문단들을 파견했다. 그후 1950년 5월 전면적 인사개편에 착수해 북한 파견 군사고문단들을 광범위한 전투 경험이 있는 고문단으로 대체했다. 6·25 남침계획은 바로 이 소련고문단이 직접 작성했다.

당시 니키타 흐루쇼프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 4월 소련 방문 때 김일성은 남침하면 남한정권에 반대하는 인민 봉기가 촉발돼 한반도는 군사작전으로 단기간 내에 신속한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스탈린을 설득하려고 했다. 김일성의 설득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남침은 결정적 기습공격이므로 3일 안에 승리할 것이다. 둘째, 남한에 존재하는 약 20만명의 공산당원 봉기가 있을 것이다. 셋째, 남한의 게릴라들이 인민군을 지원할 것이다. 넷째, 미국은 참전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폴 윙그로브 전 그리니치대 역사학 교수의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발췌

캐이서린 웨더스비 플로리다주립대 역사학 교수의
‘한국전쟁의 시작 배경’ 발췌

정리 정 철 객원해설위원 서울대 법대 졸업‧전문경영인(삼성‧효성그룹 종합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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