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일 뿐
경제민주화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일 뿐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3.07.0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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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이 경제민주화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6월 26일 국회 정무위는 대기업 계열사 일감몰아주기방지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하면 30% 이상의 지분을 가진 대기업 주주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가 편법승계용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한마디로 ‘네 죄를 네가 알렸다’식이다.

금산분리강화법안의 경우 산업자본의 금융회사 지분율을 9%에서 4%로 축소조정하는 쪽으로 결정됐다. 아울러 제2금융권에 마저 대주주자격 요건을 강화해 8촌 혈족 내에 경제사범이 없어야 한다는 ‘신연좌제’안이 마련됐다.

재벌 규제를 위한 경제민주화

정치권이 이렇듯 과도한 기업규제법안을 양산하는 이유는 한결 같이 재벌 대기업에 대한 징벌이 목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법이라는 이름은 사실상 ‘재벌규제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혼란이 없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라는 개념은 지난 대선 때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이 제시했다. 당시 여권과 재계 등은 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김 전 위원에게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그는 항상 모호하거나 침묵의 태도를 보였다. 그렇기에 경제민주화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른 양상을 띠게 됐다.

경제민주화는 영미권 경제학계에서는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경제민주화는 19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핵심강령이었기 때문인데 독일어로는 ‘Demokratisierung(민주화) der Wirtchaft(산업경제)’였다. ‘데모크라티지훙 데 비르트차프트’라고 읽는다.

독일의 경제민주화는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고 그 이념가들과 경쟁했던 번슈타인(E. Bernstein)과 나프탈리(F. Naphtali) 등과 같은 학자들이 최초로 주창한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요체였다.

즉 자본주의는 대기업의 독재를 초래하고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초래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모든 독재에 반대하는 이념이 바로 사회민주주의였고 그 실천 방법이 경제민주화 즉 ‘데모크라티지훙 데 비르트차프트’였던 것이다.

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을 역임한 민경국 강원대 교수(경제학·독일 프라이부르그대)는 독일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바로 ‘사유재산의 사회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업은 노동자들이 자치적으로 경영하는 형태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독일 사민당의 경제민주화는 이후 퇴조를 거듭해서 지금은 당강령에 선언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패전 독일을 라인강의 기적으로 이끈 기민당 에르하르트 총리와 발터 오이켄이 채택한 또 다른 경제이념 때문이었다. 그것은 ‘Liberaliseirung der Wirtchaft’(경제 자유화)라는 질서 자유주의였다. 흔히 ‘오르도 리베럴리즘(Ordo Liberalism)’이라고 부른다.

독일에서 공부한 김종인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당이 강령으로 선택한 경제민주화의 개념을 차마 자기 입으로 밝히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그는 이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해 “절제 없는 시장경제를 맹신하는 사람은 정서적 불구자”라고 언론에 말한 바 있다.

그의 이 말은 다름 아닌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이 한 말이다. 그런 새뮤얼슨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주의가 망하기 3개월 전에도 소련식 계획경제도 마찰 없이 아주 잘 번영한다고 주장한 비현실적 인식의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헌법 119조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도 그런 개념일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색다른 견해가 있다.

1987년 민주화운동은 경제에 있어서도 민주화를 요구했다. 6공화국은 이에 노동계와 산업계로부터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견 청취에 나섰고 당시에 제시된 경제민주화는 정부주도의 관치경제에서 민간경제로의 이행이라는 해석이 우세했다.

그랬기에 1987년 경향신문은 ‘경제민주화의 첫걸음’이라는 기사에서 공기업 민영화의 ‘국민주’ 방식을 경제민주화의 방안으로 제시하며 ‘정부의 간섭 없는 경제운용이 경제민주화의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또 한겨레신문도 비슷한 시기에 한국은행의 독립을 경제민주화의 의미로 해석하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원래 의미는 정부 간섭 없애는 것

당시 국회 법사위에서 87체제 헌법개정을 주도했던 현경대 전 의원 역시 “경제민주화는 관치에서 민간으로의 경제 운용”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여기에는 노·사간의 자율적인 협상도 경제민주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87년 헌법 119조 2항이 ‘경제주체의 조화’를 통한 ‘경제민주화’를 표명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다시 한번 드러난다. 즉 경제의 주체인 기업, 가계, 정부가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경제활동을 추구한다는 의미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이나 가계가 정부에 세금을 낮출 것을 요구하거나 규제를 해소해 달라는 요구도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정당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헌법의 경제민주화는 결코 당시 재벌기업에 대한 규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현재의 경제민주화는 재벌 대기업에 대한 규제 일변도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 재벌기업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것일까.

이 의문은 우리 사회가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에서 사회 전체에 사회주의 경향이 확산돼 왔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 김대중 정부가 추진했던 노사정위원회는 사실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이 추진했던 ‘코포라티즘’이라는 협동주의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독일 사민주의 정책이 추구했던 제도였던 것. 하지만 독일의 노사정위원회는 ‘사회적 영성’을 통한 현실참여를 추구해 왔던 교회들의 초월적 질서가 갈등을 통합하는 역할을 해왔다.

독일 사회는 그러한 교회들의 위상을 인정하는 관습에 따라 교회에 세금을 걷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출석교인들이 교회에 자기 소득의 1/10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교회세제도를 갖게 됐다.

이러한 독일의 교회들은 2003년 독일 사민당이 침체에 빠진 독일경제를 일으키고자 제시한 자유주의 경제개혁 ‘아젠다 2010’ 노사정 협약에서 완강하게 저항했던 노조가 타협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한 독일사회의 독특한 전통과 관습이 경제민주화를 사회주의로 흐르지 않게 만든 힘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대한민국의 경제민주화가 추구하는 결과는 무엇일까. 재벌의 개혁일까.

세계 모든 국가의 기업들은 그 나라 사회의 고유한 제도와 법, 더 근본적으로는 정치문화라는 환경에 적응해 진화해 온 사회적 유기체다. 그렇기에 각 나라 기업의 조직과 소유구조, 경영방식에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들을 저마다 간직하고 있다. 한국의 재벌 역시 그런 ‘한국적 상황’의 진화물이다.

재벌은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의 법안 몇 개로 개혁될 대상이 아니라 시간을 갖고 진화시켜야 할 존재다. 다름 아닌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말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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