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가치 전쟁이었다”
“6·25는 가치 전쟁이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7.0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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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좌담] 정전 60주년 기획

좌담자: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前월간조선 편집장), 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 (前청와대 통일비서관)

사 회: 황성준 본지 편집위원 (前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

6·25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됐다. 그럼에도 아직 무엇인가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우선 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부터가 논란이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사실이 명확한데도, 한때 학계 일부에서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브루스 커밍스 류의 수정주의적 해석이 유행했을 정도였다.

최근에는 우리 국민에게 6·25전쟁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될 비참한 민족의 과거사로만 여겨질 뿐이다. 동서 간 이념대결의 큰 흐름 속에서 잘못 태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이다. 이런 관념에선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전쟁에서 지키려 한 자유라는 이념과 가치가 가해자의 한 축이 된다.

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그런데 과연 그럴까? 6·25전쟁은 정말 비극이기만 한 것일까? <미래한국>은 정전 60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한국현대사의 전문가를 모시고 6·25전쟁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다음은 조갑제 대표와 김영호 교수가 말하는 6·25의 본질이다.

사회 : 6·25전쟁의 원인에 대한 이론이 분분합니다. 두 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조갑제 : 소련의 스탈린이 1950년 8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에 보낸 전문이 2005년 발견됐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뒤 열린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이 결정될 때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가 불참한 이유를 설명한 것인데, 스탈린 본인이 명령했다는 내용입니다.

요약하면 미군에 ‘프리핸드’를 줘서 6·25전쟁에 참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줬다는 것입니다. 미군이 참전하면 중국군이 참여하고, 미군과 중국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여 발이 묶인다는 계산이죠.

이세기 전 통일부 장관이 1977년에 쓴 박사 논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에요. 미국과 중국이 화해 분위기를 보이자, 스탈린이 양국 간 전쟁을 유도해 중국을 소련에 종속시켰다는 내용이죠.

김영호 : 네. 조갑제 대표님이나 이세기 전 장관님 같은 분들 말씀은 6·25전쟁을 국제 수준의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미국 문서를 봐도 그렇습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나 애치슨 국무장관 등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모두 이 전쟁의 배후는 스탈린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반도에서 벌어졌지만, 미국과 소련의 국제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회 : 전쟁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는 문제인데, 북한군이 6월 28일 한강 이북의 서울을 점령하고 3일 동안 한강을 건너지 않고 지체한 것이 미스테리입니다.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 남일의 군사고문이었던 발렌틴 소지노프라는 소련군 퇴역 대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본인도 당시 이해가 안 돼서 알아보니 정치국에서 군부는 관여하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어요.

김영호 :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을 봐도 그런 의문이 나옵니다. 서울을 점령하고 바로 밀고 내려왔으면 위험했다는 말이 있어요. 6월 29일 서울에 온 맥아더 장군이 전쟁 발발 10일 간이 가장 중요한 기간인데, 북한군은 왜 3일이나 서울에서 지체했는지 의문이었다는 말이죠.

조갑제 : 6·25에 대해 아직도 미스테리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황장엽 선생에게 들은 얘기인데, 김일성이 직접 본인에게 스탈린에 대한 비난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서울을 점령했는데 ‘스탈린이 장비를 안 도와줘서 그것 기다리느라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죠.

또 하나가 장진성이라는 탈북시인의 말인데, 이분은 김일성 집안의 역사를 정리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래서 비밀자료를 많이 접했는데, 거기에 ‘스탈린이 서울 점령 후 붙들어 둬서 전쟁에 졌다’는 내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김영호 : 말씀을 종합하면 스탈린이 장비를 주지 않은 게 문제였다는 것이네요.

조갑제 : 네 그렇긴 한데, 사실 그때 한강철교는 이어져 있었거든요. 넘어갈 수 있었어요. 실제로 나중에 이 다리를 이용했습니다. 제 생각엔 스탈린이 거기서 일단 멈추라고 했을 것 같아요.

미국이 개입할 시간을 벌자는 것이죠. 웃기는 말이지만, 스탈린은 김일성이 너무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같아요. 스탈린은 한국 전체에 대한 욕심보다는 미국과 중국의 무력 충돌을 원했으니까요.

김영호 : 제 생각에 6·25는 이렇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소련전문가 아담 울람 교수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내내 공격 허가를 받기 위해 스탈린에 계속 매달렸어요.

그러다가 ‘변화된 국제정세에 의해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는 전문을 1950년 1월 30일자로 보내죠. 100m 육상선수처럼 스타트라인에 잔뜩 웅크려 있던 김일성에게 출발 신호를 쏜 것입니다. 국제체제 측면에서 볼 때, 소련과 중국, 북한이라는 북방의 공산3각 협조체제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스탈린 입장에선 미국과의 냉전 대결 측면을 고려한 것이죠. 전문에 나온 변화된 국제정세라는 시점은 소련과 중국이 새로운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한 직후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 모택동의 동의를 받으라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미국의 군사적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소련은 이후 2월부터 북한을 도와 작전계획을 세우고 탱크 등의 무기도 보냅니다.

우리에게 6·25란?

사회 : 한국전쟁, 6·25동란 등 6·25전쟁에 대한 명칭 문제도 아직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게 학술적, 역사적으로 맞는 명칭일까요.

김영호 : 국제적으로는 ‘Korea War’ 즉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이 굳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과거의 전쟁과 헷갈리죠. 그래서 6·25전쟁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6·25남침전쟁이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어요. 저는 명칭은 6·25전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단 남침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전쟁 발발의 기원, 의미를 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필요하지요.

조갑제 : 명칭을 하나로 통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국제적으로 한국전쟁, 즉 ‘코리안워’라고 하듯이, 저도 필요에 따라 한국전쟁이라 하기도 해요. 미국의 남북전쟁도 미국 내에선 ‘시빌워(Civil War)’라 하고, 우리는 남북전쟁이라고 하잖아요. 단 교과서에선 국내적 용어이니 6·25남침전쟁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회 : 사실 지금 시점에선 6·25전쟁에 대한 평가 문제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비극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이제는 이것을 넘어 건국 초기 대한민국을 지킨 자유수호전쟁이라는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김영호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동의와 원조를 받아서 신생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체제로 적화시키려 한 것입니다. 이 전쟁은 체제와 가치 차원에서 봐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대한민국의 핵심가치를 지키기 위한 호국전쟁인 것이죠. 자유수호 전쟁입니다. 이 호국전쟁이 없었으면 그후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어려웠습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조갑제 : 2000년 6월 2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국전쟁 5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에서 전쟁의 의미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어요. ‘미국이 한국에서 버텨낸 덕분에 냉전에서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므로 소련은 미국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기꺼이 싸울 준비가 돼 있다는 가르침을 얻게 됐습니다’라는 내용입니다. 즉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한국전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국전에서 미국이 개입하고 대소봉쇄망이 이뤄지면서, 그 연장선 위에서 미국 레이건, 부시 대통령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트루먼이 마스터플랜을 짠 거죠.

사회 : 6·25전쟁이 사실 세계사적으로 볼 때도 자유수호 전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죠.

김영호 : 네. 미국도 전쟁 당시와 직후에는 국내에서 비판이 많았어요. 냉전이 서구진영의 승리로 끝나면서, 의미가 부각된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는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봉쇄정책을 입안하고 6·25를 통해 미국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냉전 승리에 밑바탕이 됐다고 평가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생전에는 저평가 받았으나 지금은 평가가 높아졌습니다.

조갑제 : 그리고 미국이 한국에 파병한 것에 대해 우리 스스로도 폄하하는 분위기는 문제입니다. 미국 국익에 맞기 때문에 보낸 것 아니냐는 식이죠. 하지만 자유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잘 모르는 나라에 젊은 국민을 보낸 것은 세계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휴전협상을 하면서 포로 송환과 관련해 미국은 반공포로를 돌려보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요. 이렇게 해서 협상이 지체된 사이에 미군 전체 사상자의 45%가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미국은 자국 군인과 포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인권이라는 원칙을 지킨 것입니다.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은 전범이다

김영호 :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당시의 국제원칙은 강제 송환이었고, 트루먼의 원칙은 자율 송환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게 바로 체제의 문제, 가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처음부터 6·25전쟁이나 냉전이라는 것은 체제 대결, 가치 대결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로 그 나라의 핵심가치에 대해선 양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 : 네. 그러니까 6·25가 세계사적으로 자유수호 전쟁이었다는 것인데, 이런 부분은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국내적으로 볼 때 6·25는 어떤 영향을 줬을까요. 그리고 전쟁은 끝난 것일까요.

조갑제 : 6·25 전쟁을 보는 시각을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이념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체제 간 대결로 봐서 성격을 규정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자유를 지키기 위한 ‘성전(holy war)’라고 생각해요.

6·25전쟁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에 보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공산주의 실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죠. 좌익세력은 국회에 진출하고, 일부 지역에선 게릴라전이 일어났던 상황이기도 했죠. 그리고 미국의 군사 지원은 미약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이후를 보면 한미동맹이 형성됐고 우리 국군이 미국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운영되는 70만 명 규모의 강군이 됐습니다. 반공자유민주주의가 한국을 지배하면서 산업화를 이끕니다. 결국 6·25는 비극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를 흘려 자유민주주 체제의 승리를 이끈 대가로 대한민국의 산업화 민주화가 가능했다고 봅니다.

김영호 성신여대 정외과 교수

김영호 : 현재 동북아 안보 상황을 볼 때도 6·25전쟁 때문에 만들어진 동북아체제도 고려해야 합니다. 사실 한미동맹은 6·25전쟁 때문에 구축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한미동맹의 틀을 깨는 시도는, 먼저 전쟁의 주요 가해국가들이 과거 문제를 인식하고 현재 동북아 안보 상황에 대한 해결 노력을 보여야 합니다. 특히 중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긴장 완화에 앞장서야 한다고 봅니다. 이것이 신흥 강대국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조갑제 : 전 지금 6·25를 다시 본다면, 전쟁의 책임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그냥 동서냉전의 결과라고 비슷한 비중으로 말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의 주범은 스탈린과 모택동, 김일성 세 놈입니다. 그 중에 김일성이 가장 나쁩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이라는 외세에 이용당해 앞잡이가 돼 동족을 공격한, 바보이자 악마에요.

김일성의 이 전쟁 범죄는 대를 잇는다고 보는데, 김정은한테도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 요새 평화협정 논의가 나오는데, 6·25전쟁을 종결하기 위해서는 전쟁의 책임자에 대한 정리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25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입니다.

자유 통일이 진정한 종전이다

사회 : 전쟁 책임론을 따지자면 스탈린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모택동도 분명 동조한 책임이 있겠죠.

조갑제 : 스탈린은 국가 간 전쟁도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으로 인식합니다. 인권이나 생명보다는 단지 정치행위일 뿐인 거죠. 2차대전에서 독소불가침 조약으로 독일이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도록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과 협상을 담당한 미국팀에 재무부 차관보까지 했던 덱스트 화이트란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소련 간첩이었습니다. 결국 미국협상팀은 일본에 중국, 만주, 인도차이나에서 철군하라는 요구를 해서 일본이 전쟁 결심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김영호 : 맞습니다. 국제정치적 시각이 중요한데,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6·25 전쟁이 휴전되죠. 소련 문서를 보면 1952년 8월 중국의 주은래가 스탈린을 만나러 가는데, 김일성이 주은래에게 제발 전쟁 끝내게 해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어요. 김일성이 황장엽에게 ‘스탈린에게 당했다’라고 한 것도 같은 말이죠.

조갑제 : 김일성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전쟁을 끝내자고 해도 스탈린은 동의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가관이에요. ‘잃는 게 뭐냐? 사람 생명 잃는 것 밖에 더 있냐’라고 했다니 정말 악마적입니다.

사회 : 우리나라 반공이데올로기는 6·25전쟁이 만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라는 게 이념과 가치가 없는 것, 몰가치한 개념이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조갑제 : 확실한 것은 6·25전쟁 때 이승만이나 맥아더, 트루먼 같은 한국과 미국의 지도자는 공통적으로 공산주의를 상대악이 아닌, 절대악으로 봤다는 거에요. 공산당을 흔히 있는 독재가 아니라, 없애야 절대 악으로 본 것이죠.

김영호 : 대한민국 건국도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체제 문제를 절실히 인식했기 때문에 단독정부 수립이 가능했습니다. 당시 다른 지도자들이 건국을 민족 관점으로 본 것과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던 거죠.

사실 최근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걱정스럽습니다.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는 행태는, 맥아더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면 안 됐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사회 : 통일이 진정한 6·25전쟁의 종결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조갑제 : 전 현재 북한이 붕괴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통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6·25전쟁의 평가를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라고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통일의 추진력을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김영호 : 맞습니다. 6·25전쟁이 체제와 가치 대결이었다는 사실은 통일 과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통일을 민족통일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체제와 가치의 통일이 원칙이라는 사실을 일깨운 것입니다.

정리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사진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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