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양보는 더 큰 참화를 부른다
어설픈 양보는 더 큰 참화를 부른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7.0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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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호의 역사이야기
 

2차 대전 발발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떠올려보자. 첫 번째는 당연히 히틀러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여기서부터는 좀 복잡해진다. 관점에 따라 견해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당시 영국 총리 체임벌린의 책임이 크다는 데 동의한다.

1차 대전이 끝난 지 20년, 유럽에는 또 다시 긴장이 감돈다. 히틀러는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며 도전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1938년 3월 13일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합병에 성공했다. 비스마르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었다. 독일 국민은 열광했고 히틀러는 다음 노림수를 진행시켜갔다. 대상은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베르사유 체제의 안전핀 체코슬로바키아

1차 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들은 전후체제를 구축하면서 여러 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그 핵심 중 하나였다.

전승국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체코슬로바키아를 독립시킨 건 게르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라는 게르만 양대 국가 사이에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는 베르사유 체제의 가장 중요한 안전핀이었다. 히틀러의 입장에선 게르만 민족의 뒤통수에 박아놓은 ‘대못’이었다.

프랑스에겐 독일의 동쪽 배후지에 위치한 체코슬로바키아가 전략적으로 특히 중요했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가리켜 유럽의 한 가운데 있는 프랑스의 항공모함이라고 불렀다.”(도널드 케이건). 독일이 더 팽창하기 위해선 1차적으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수중에 넣는 것이었다.

엉뚱하게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히틀러의 외교적 무기 노릇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에는 350만에 달하는 독일계 주민들이 있었다. 히틀러는 이들의 권리 보호를 내걸고 집요한 공작을 벌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경고’를 계속했지만 결국 ‘협상’으로 긴장 상황을 해소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1938년 9월 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주데텐란트 문제를 히틀러와 직접 논의하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9월 29~30일 양일간 뮌헨에서 회담이 열렸다. ‘4자 회담’이었다.

체임벌린, 독일의 대못을 뽑아주다

무솔리니의 중재로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와 체임벌린, 히틀러 이렇게 4인이 자리를 마주했다. 히틀러는 독일은 단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의 보호를 바랄 뿐, 결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역설했다.

회담 결과 히틀러의 요구대로 주데텐란트를 분리시켜 독일에 합병시키는 것이 승인됐다. 그리고 ‘평화주의자’ 히틀러는 그 보답으로 영국에 독영불가침 협정을 선사했다. ‘뮌헨협정’이었다.

귀국한 체임벌린은 다우닝가에 운집한 군중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뮌헨협정서’를 흔들며 선언했다. “명예로운 평화, 우리의 시대를 위한 평화를 쟁취했다.”

그러나 처칠은 1938년 10월 5일 영국 하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힐난했다. “히틀러가 총을 겨누고 1파운드를 요구했다. 1파운드를 주자, 그는 이번에는 2파운드를 요구했다. 최종적으로 그는 1파운드 17센트 6다임을 받고 나머지는 앞으로 친하게 지내는 대가로 돌리는 데 합의한 것이다.”

처칠의 말처럼 뮌헨협정이 바보짓임이 증명되는 데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진격해 나머지 지역도 모두 손에 넣었다. 독일은 대못을 뽑았지만 유럽의 입장에선 안전핀이 뽑힌 것이었다.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를 양보하지 않았으면 유럽의 운명은 달라졌을 수 있다. 설사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전쟁을 일으킨다 해도 영불이 강하게 버텨 전선이 교착된다면 독일은 거기에서 많은 힘을 소진했을 것이다. 그러면 더 큰 전쟁은 막아졌을 수도 있다. 결국 체임벌린 등의 유화정책에 의한 양보가 더 큰 참화를 불러들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략적 중요성은 지정학적인 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슬로바키아 지역은 농업 지역이었지만 주데텐란트를 포함한 체코 지역은 유럽 최고의 공업지대 중 하나였다.

최고 수준의 산업 인프라까지 선물로 ‘상납’한 셈이다. ‘체코 기관총’은 정밀 기계공업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총부리가 나중에 영국과 프랑스를 향했다.

북한의 NLL 도발의 배경

NLL(북방한계선)은 결코 시비의 대상일 수 없었다. 6·25전쟁 당시 서해의 제해권은 일방적으로 아군의 수중에 있었다. 굳이 하고자 했다면 북측의 서해 전체를 계속 장악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유엔군 측이 스스로 물러나 설정해준 경계선이 NLL이었다. 북한 입장에선 당연히 감지덕지였고 시비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NLL이 설정된 1953년 이후 1972년까지 북한은 20년 가까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준수했다. 그러다 1973년 돌연 서해 5개도 주변 수역을 북한 영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해 NLL은 다시 한 번 남측 관할로 재확인된다. 합의 11조는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을 분명히 했다. NLL에 대한 남측의 실효적 관할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1999년부터 북한은 NLL 도발을 또 다시 본격화했다.

하나의 규칙이 발견된다. 북한은 국제정세나 실력의 측면에서 기회라는 판단이 있을 때 도발을 했다. 1973년 시비를 걸기 시작했을 때 거기에는 닉슨 독트린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미국은 1972년 중국과 수교를 했다. 미중수교를 한 이상 미국이 동북아에서 심각한 충돌을 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1991년은 반대 상황이었다.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이 차례로 붕괴하면서 북한은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NLL을 시비할 처지가 아니었다. 북한이 도발을 다시 본격화한 것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였다. 1999년 6월 1차 서해교전이 있었다.

김대중은 햇볕정책을 간판으로 하여 노벨 평화상까지 노리고 있었다. 당연히 공격적 대응을 하지 못할 것이라 계산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2002년 2차 서해교전이 있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상속한 노무현 정권은 북에 대한 강경 대응을 삼갔다.

북한은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의 햇볕정책과 퍼주기 덕분에 편하게 핵무장의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북한은 이명박 정권 들어 천안함 폭침을 시작으로 계속 도발을 감행했다. 준비가 돼 있는데 도발을 안할 이유가 없었다.

어설픈 평화의 구호가 전쟁을 만든다

10·4 선언 당시의 노무현과 김정일의 NLL 대화록이 공개됐다. 야당의 말마따나 ‘NLL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다. 차라리 자발적 상납을 위한 아양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히틀러에게 체코를 넘겨주고 평화를 지켰다며 희희낙락한 체임벌린을 떠올려본다. 체임벌린은 바보이긴 했어도 반역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의 언행에선 반역의 냄새마저 풍긴다.

노무현은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나름 그것을 확신했으리라. 그러나 NLL이 무력화되면 수도권은 무방비에 놓인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도발의 유혹을 더 강하게 느끼게 만들 게 틀림없다. 그래서 NLL을 함부로 농단하는 것은 의도했든 아니든 여적의 반역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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