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대화편 중 <국가>, <소피스트>와 <정치가>에서는 정치가와 철학자, 유사 철학자의 특징과 역할이 여러 방식으로 논의된다.

‘소피스트’가 철학자 연하는 소피스트의 정체를 집요하게 밝혀내고 있다면, ‘정치가’에서는 참된 정치가의 기능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 참된 치자(治者, politikos)의 본 모습을 규명하고 있다. 여기서 도출되는 ‘왕도적 치자’(basilikos)는 ‘국가’에서 논의되는 철인왕에 다름 아니다.

플라톤은 ‘정치가’에서 바람직한 정치가의 기능과 기준을 ‘드러내기’ 위해 상당한 분량의 변증술로 논의를 이끈다. 특정 개념을 도출하기 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집요하게 묻고 대답하는 문답법(dialektike)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그 개념을 드러내는 식이다.

하나로 된 커다란 바위를 정으로 끊임없이 쪼아가면서 그 속에 확고하게 내재하던 개념의 상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 같기도 하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이 돌 속에 갇힌 온전한 형체를 드러내기 위해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작업의 과정에서 탄생했듯이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산파술(産婆術)이라 일컫는 까닭이 이해된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최선의 통치는 법률에 의한 통치가 아니다. 사실 이는 ‘차선의 통치’이다. 최선의 통치는 지혜를 갖춘 ‘왕도적 치자’에 의한 통치다.

인간 통치와 관련된 완전한 지식을 갖춘 자만이 왕도적 치술을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왕도적 치자’는 현실적인 정치가의 모습이 아니라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다.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지만, 이상적 지향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왕도적 통치가 법 위의 통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의 공백을 보충해주는 초월적 위치의 통치에 가깝다.

참된 왕도적 정치술이 요구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국가의 법률은 인간 사회 개개인의 모든 상황에 적합한 적용을 그때그때 제시해주지 못한다.

법률은 보편적 상황을 전제해 입법된다. 따라서 변화하는 상황에 놓인 개개인에게 적합한 적용을 위해서는 법률이 미처 제시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통찰적 적용이 필요하다. 탁월함(arete)과 지식을 갖춘 통치자는 가장 올바른 것을 지성(nous)과 기술을 통해 국가 안의 모든 이들에게 적정한 보살핌을 베풀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은 왕도적 통치술의 핵심기능을 옷감의 직조술에 비유한다. 씨실과 날실을 알맞게 엮어 짬으로써 훌륭한 모직옷감이 만들어지듯 훌륭한 통치술은 지식과 기술의 적정한 교합이 이루어질 때 제대로 발휘된다.

왕도적 통치는 판단술이며, 일종의 지식(episteme)이어야 한다. 인간의 통치와 관련된 이러한 기준으로서의 지식은 지혜(phronesis)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지혜를 갖춘 통치자만이 법률이나 관습의 공백을 뛰어넘는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왕도적 치자에게 어울리는 정체(政體)는 무엇일까? 왕도적 치자가 곧 군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주정, 귀족정 등 소수가 지배하는 정체에서 왕도적 치술이 더 용이하다고 본다. 민주정체의 경우 이성과 지혜보다 데마고그(demagogue)의 선동에 휩쓸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왕도적 치자에겐 용기(andreia)와 절제(sophrosyne)가 씨실과 날실처럼 결합돼야 한다. 플라톤은 이런 완벽한 정치가가 있다면 1인통치일지라도 최선의 정체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정치가가 국민의 불신과 조롱을 받는 것도 정치가의 본질적 기능인 통치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정치가가 지혜와 덕을 쌓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경귀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