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친(美親) 화가의 열정의 발자취
어느 미친(美親) 화가의 열정의 발자취
  • 이원우
  • 승인 2013.07.11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展 서울시립미술관 개최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1897-1898)

“여기 세상의 평판이나 관습을 전혀 개의치 않는 남자가 있다. 그는 마치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같이 전혀 붙잡을 수가 없고, 그래서 불법 행위와도 같을 만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中

폴 고갱(1848~1903)의 입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친구’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또렷해지는 경향이 있다. 두 사람은 남프랑스 아를(Arles)의 ‘노란 집’이라는 화실에서 함께 살았다.

우정만큼이나 깊었던 두 사람의 갈등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폭발했다. 이로 인해 예술에 미친 광인(狂人)의 이미지는 고흐의 것이 된다. 많은 이들이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등 반 고흐의 대표작 몇 편쯤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폴 고갱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전시회가 지난 6월 14일부터 서울 중구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전시회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 그리고 그 이후>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해 상징주의와 종합주의를 탄생시킨 폴 고갱의 진면목을 통시적으로 드러낸다.

폴 고갱은 정치부 신문기자인 아버지 클로비 고갱과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그의 삶은 시작부터 격랑이었다. 프랑스의 1848년은 공화정으로 가는 험난한 도상에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예술혼

이상주의자들이 오랫동안 꿈꿔온 ‘낙원’이 도래하는가 싶었지만 날이 갈수록 프랑스의 혼란은 깊어만 갔다. 이에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떠나 신문사를 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리마로 가는 여객선에서 가족들만 남긴 채 사망하고 말았다. 고갱 일가의 리마 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854년 할아버지의 유산이 있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오지만 어머니 알린의 삯바느질 없이는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됐다. 그녀마저 1871년 사망하자 도선사로서 세계를 누비던 고갱은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소의 직원이 된다.

설교 후의 환상(1888)

결혼 이후 주식중개인으로서 조금씩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고갱은 인상주의 작품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展’은 조금씩 인상주의 스타일을 작품을 습작하던 고갱의 초기작들도 공수해 전시하고 있다. 고갱 작품의 특징인 뚜렷한 윤곽선이나 타는 듯한 색채 사용이 드러나기 전의,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정물과 풍경화들이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의 붕괴는 고갱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됐다. 드디어 그가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는 또한 고갱이 생활인으로서의 역할 행동을 포기하고 예술인의 범주에 속하게 됐음을 의미했다.

이 시기부터 인상주의의 편린을 답습하던 고갱의 그림은 점점 독창적으로 변해가지만 그에 반비례해서 가족들과의 관계는 악화돼 갔다. 세상 또한 그의 작품을 알아준 것은 아니었기에 홀로 남은 그의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광기와 예술혼이 뒤섞인 고흐와의 만남도 대략 이 무렵의 일이다.

세상에 대한 적대감과 문명에 대한 혐오를 적층해 가던 그의 내면은 결국 고갱의 작품세계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인 타히티를 지향하게 된다. 때는 1891년. 고갱의 삶을 토대로 ‘달과 6펜스’를 쓴 서머싯 몸은 혈혈단신으로 타히티로 떠난 그를 ‘대개의 사람들이 틀에 박힌 생활의 궤도에 안착하는 나이에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낙원’에서 직면한 또 다른 절망

황색 그리스도(1889)

하지만 타히티 파페에떼 섬에 도착한 고갱을 맞이한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절망이었다. 원시 세계에 대해 턱없이 높은 이상을 품었던 고갱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는 타히티의 환경에 부딪쳐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마타이에야 섬으로 옮긴 이후에야 그의 눈과 손길에 타히티의 열대적 색채와 에너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타히티의 여인들’, ‘세 명의 타히티인’ 등의 작품을 남긴 이 ‘폴리네시아 시기’야말로 고갱 작품의 정수가 수립되는 순간이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당시 젊은 화가였던 피카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고갱은 타히티의 수많은 미성년 정부들과 방탕한 생활을 했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선동하기도 했지만 몸과 마음은 계속 피폐해져갔다. 코펜하겐에 살고 있던 가족과의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으며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흥행이 되지 않았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고갱을 감싸고 있던 것은 가난과 고독, 우울증과 영양실조였다. 처절한 패배감으로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마지막 유언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생의 역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다. 타히티인들의 다양한 군상을 그려낸 세로 1.4미터 가로 3.7미터의 이 대작은 구석구석에 상징과 비유, 상념과 성찰이 가득하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9월 29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회는 이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갱의 3대 걸작 중에서 나머지 두 작품인 ‘설교 후의 환상’, ‘황색 그리스도’ 또한 만나볼 수 있다.

세 작품이 한 전시에 동시에 소개되는 것은 고갱 전시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고갱의 정신을 이어받은 21세기 화가들의 작품도 함께 전시돼 생애 내내 고난과 함께였던 고갱의 절망이 ‘그 이후’에 이르러 열매를 맺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