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공포의 디스토피아, 소설 밖에서는?
충격과 공포의 디스토피아, 소설 밖에서는?
  • 이원우
  • 승인 2013.07.23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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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를 읽는 남자: 장편소설 <28> (정유정 著)
정유정 著, 은행나무 刊, 2013

소설에는 결국 작가의 가치관,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진입한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28>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기독간호대학을 졸업해 119구조대원과 결혼했다고 하는데요. 이로 인해 ‘28’에는 간호사와 119구조대원들의 삶이 굉장히 현실감 있게 반영될 수 있었습니다.

작가들의 자의식이 내적으로 공전하는 이 시대의 많은 한국 소설들과 달리 ‘28’은 새로운 도시 하나를 창조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과 동물들의 사투를 역동적으로 다룹니다.

작품에는 가상의 도시가 등장하는데요. 수도권 인근 도시, 인구 29만 명의 화양(火陽)이라는 도시입니다. 2014년 1월, 산 다섯 개와 봉우리 열두 개에 둘러싸인 이 가상의 분지도시에 불어 닥치는 28일간의 재앙을 다룬 것이 작품의 골간입니다.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은 ‘빨간 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상의 전염병인데요. 특이한 것은 이 병이 이른바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개에게 옮길 수 있고 개가 사람에게도 옮길 수 있는데다 엄청난 전염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사람과 개가 죽어나가며 처참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집니다. 화양시는 삽시간에 무정부 상태가 되고, 작품은 그 안에 던져진 수의사, 간호사, 119구조대원, 신문기자, 범죄자, 그리고 개 링고의 모습을 추적합니다.

총 여섯 개의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사건을 진행시키는 구성은 신선합니다. 특이한 건 개의 시점인데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사상 최초로 ‘개가 되어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개 링고의 시점에서 세상과 인간을 보고 사랑에 빠지고 분노하는 체험. 다만 색다른 건 분명한데 순간순간 ‘개가 이렇게까지 고등한 동물이었나’ 싶은 생각도 들긴 했네요. 사람처럼 분노하고 눈물을 흘리고 과거를 기억하고, 103페이지에는 ‘충격과 분노와 모욕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구제역 파동으로 소와 돼지가 살(殺)처분 되는 광경을 보고 작가가 충격을 받으면서 시작된 소설인 만큼 ‘동물의 마음’에 주목한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소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개보다도 단순한 존재로 그리지 않았나 싶은 아쉬움은 남네요. 화양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는 시민들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발포하는 군인들, 개를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박동해’의 범죄행각 등은 소설 속에서 전형적인 ‘악의 축’으로 편리하게 소비됩니다.

전반적인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무겁습니다. 작품 속에는 매우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또 매우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전염병에 점령당한 화양시를 ‘버리는’ 정부와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정유정 작가가 이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문득 북한에 대한 생각이 들더군요. 북한이야말로 어찌 보면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김씨 부자의 전체주의 독재에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더 이상 통일을 원하지 않는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마치 경기도 화양시 보듯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유정 작가가 이 소설에 북한을 암시하는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적인 비관 못지않게 참혹한 지경에 처해 있는 장소가 바로 우리의 머리 위 북한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정유정의 ‘28’이었습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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